모나리자 크기로 도화지를 자르면 저작권 위반인가? (부제: rHWP용 Metric-compatible fonts를 위한 질문)
(github.com/edwardkim)폰트는 각 글자마다 크기가 정해진 투명 도화지를 선언하고, 그 도화지를 채우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문서에서는 이 도화지들을 옆으로 나란히 놓거나, 한글 자소 결합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겹쳐 놓으면서 표현한다.
같은 hwp 문서를 다른 컴퓨터에서 열었을 때 줄바꿈이 달라지는 일이 있다. 원본 폰트가 없어서 대체 폰트가 선택됐는데, 대체 폰트의 도화지 크기가 원본의 것과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오픈소스 진영은 지난 30년 가까이 풀어왔다. 저작권 폰트와 도화지 크기를 똑같이 맞춰서, 폰트가 바뀌어도 자간·줄간격·줄바꿈이 변하지 않는 Metric-compatible fonts를 개발하고 매핑표를 공개해 온 것이다. 1996년 URW++의 Nimbus 폰트 패밀리(Helvetica·Times·Courier 호환)가 GPL로 공개된 이후, Liberation Fonts(2007), Croscore Fonts(2012) 등이 이어졌다.
https://wiki.archlinux.org/title/Metric-compatible_fonts
이 30년 동안 metric-compatibility 자체를 정면에서 다툰 큰 소송은 보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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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분쟁의 전선은 "글자체 디자인"에서 "폰트 파일"로 이동했다. 글자체 자체는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정리되었고(한국 대법원 1996년, 미국 Monotype v. Bitstream 2003), 그 대신 폰트 파일을 컴퓨터 프로그램 저작물로 보호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한국 대법원 2001년 99다23246).
국내 일부 법무법인의 합의금 장사는 정확히 이 새 전선 위에서 이루어진다. "글자체야 어차피 못 잡지만, 당신은 파일을 건드리지 않았느냐"가 표준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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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문서는 한컴오피스에 종속되어 있고, 많은 문서가 한컴오피스와 함께 설치되는 폰트 파일을 사용한다. 2020년대부터 이 종속을 풀기 위한 오픈소스가 여럿 나왔고, 2026년 rHWP를 계기로 HWP 오픈소스 개발과 논의가 한층 활발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ㆍ 오픈소스 HWP 편집기·렌더러는 저작권 폰트를 사용할 수 없다.
ㆍ 그렇지만 공문서를 열었을 때 레이아웃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ㆍ 그리고 한컴오피스에 기본 포함된, 공문서에 흔히 쓰이는 저작권 폰트의 Metric-compatible 폰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매듭을 풀고자 한 프로젝트가 제안됐다. 저작권 폰트에서 도화지 크기만 가져와 비어 있는 투명 도화지를 만들고, 여기에 OFL 라이센스의 변형 가능한 오픈소스 폰트 디자인을 이식하는 것이다.
https://github.com/PolarisOffice/polaris_mc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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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걸 활용하는 데 많은 사람이 주저한다. 위에서 본 합의금 장사 행태 때문이다.
투명 도화지 자체, 그리고 도화지를 한글 자소 결합 규칙에 따라 겹쳐 표현하는 방식에는 독창성이 없어 보인다. 누가 하더라도 같거나 비슷할 수밖에 없는 기술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화지 크기를 획득하는 과정이 저작권 폰트 파일을 무단으로 분해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 있다.
https://www.oss.kr/pages/13/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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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변호사에게 물어봤다. 이런 판례를 알려주면서, 결국 법원에서 한번 법리를 따져봐야 알 것 같다고 했다.
"누가 하더라도 같거나 비슷할 수밖에 없는 표현, 즉 저작물 작성자의 창조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은 창작물이라고 할 수 없다." (대법원 2009도291)
https://casenote.kr/대법원/2009도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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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모나리자 크기로 도화지를 자르면 저작권 위반인가?
직관적으로는 아닐 것 같다. 그림의 크기는 그림의 표현이 아니다. 폰트의 표현은 그 안에 그려진 글자의 모양이지, 도화지의 치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컴오피스에 기본 포함된 폰트, 그리고 공문서·연차보고서 등에서 사용되는 폰트들의 목록을 모아 각각의 투명 도화지 폰트를 만들고, 그 위를 OFL 폰트 디자인으로 채워 오픈소스로 공개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법정에서 한 번도 다뤄지지 않은 영역이다. 누군가는 처음 그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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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열어둔 채로 둔다.
ㆍ 도화지의 크기(메트릭)는 폰트의 '표현'인가, 아니면 호환성을 위한 '기능적 사실'인가?
ㆍ 호환을 위해 메트릭만 뽑아내는 것이 폰트 파일의 무단 분해인가?
ㆍ 공문서 레이아웃을 보존해야 하는 공익적 호환 목적이라면 어디까지가 정당한 이용인가?
ㆍ 30년간 큰 소송이 없었던 해외 Metric-compatible fonts와, 한국에서의 시도가 다르게 평가될 이유가 있는가?
의견 듣고 싶습니다. 법조계, 폰트 업계, 오픈소스 커뮤니티, 그 외 다른 자리에서 보시는 분도 환영합니다.
”그러나 도화지 크기를 획득하는 과정이 저작권 폰트 파일을 무단으로 분해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 있다.“
바로 아래 언급된 대법원 판결과 함께 놓고 보면 파일을 무단으로 분해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얻은 것이 누가 하더라도 비슷한, 창조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상관없어야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현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가령, 타인이 작성한 소스코드에서 쓰이는 상수값들을 가져왔다고 했을 때, 이 값들이 창조적 개성을 가지는지? 그 값들 중에서는 누가 하더라도 똑같은 상수값을 써야하는 값들이 있지만 어떤 값들은 꼭 반드시 그 값은 아니어도 되지만 대충 비슷한 값들을 가져야 한다면 굳이 그 숫자를 선택하는 것이 창조적 개성을 띈다고 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러한 숫자들로 구성된 수열 x_n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x_n+1을 취하거나 혹은 어떤 수열 a_n을 정해서 새로운 x’_n = x_n + a_n 을 만들 경우 x’_n을 새로운 창조적 개성을 띈다고 봐야 할지? 나아가 거기에 x_n이 원 저작자의 창조적 개성이 남아있다고 간주한다면 그러한 이유로 x’_n의 창조적 개성을 인정하지 말아야 할지?
생각할 게 너무 많네요.
그 숫자들이 도화지 크기라면 단순히 창조적 개성이라고 인정하기 어렵지만 여러 색을 가진 종이쪼가리들을 잘라 붙여 모나리자처럼 보이게 만든 모자이크 형식의 작품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것 같습니다. 결국 창조적 개성이라는 것은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개별 구성요소들에서 나타나는 속성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창발하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폰트파일과 무관하게 표준 도화지 크기를 만들어서 쓰는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 폰트파일에서 얻은 도회지 크기들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그 크기들이 가져야 하는 범위를 구하고 그 범위 내에서 임의로 값을 정해서 사용한다면 창조적 개성의 논점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모든 폰트 파일이 하나같이 똑같은 도화지 크기들을 사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창조적 개성”을 반박하는 것일테고, 그렇지 않다면 다수의 파일들이 쓰는 도화지 크기의 경향성 자체는 누가 하더라도 그렇게 되므로 그 범위 자체에서 창조적 개성을 찾아볼 수 없을테니까요.
애당초 공공문서에 상용폰트를 사용한게 문제입니다. 정부에서 공문서와 공공문서에 오픈소스 폰트 사용을 강제해야 하고, 기존 문서들을 제대로 렌더링 하기 위한 오픈소스 Fallback Font를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폰트파일과 무관하게 표준 도화지 크기를 만들어서 쓰는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 폰트파일에서 얻은 도회지 크기들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그 크기들이 가져야 하는 범위를 구하고 그 범위 내에서 임의로 값을 정해서 사용한다면 창조적 개성의 논점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임의로 도화지 크기를 추정하는 방식으로는 기존 폰트 도화지 크기를 정확히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 폰트를 사용하게 될 때 문서의 레이아웃이 깨질 수 있다는 당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용 폰트의 도화지 크기를 정확히 재현한다는 목표 아래에서, 그 크기를 얻어내는 과정에 불법성이나 EULA 계약 위반이 없다고 여겨질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