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와 그 상실의 영향
(tolstoyan.substack.com)- 젊은 나이에 성취하면 잠재력의 증거로 읽히고 실수도 미숙함으로 용서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같은 결과가 훨씬 차갑게 평가됨
- 20대 초반부터 작가들의 데뷔 나이를 타임라인에 붙여 보던 화자는, 30세 전 출간을 재능의 증명처럼 여겼음
- 25세 전 완성한 두 소설은 출간되지 않았고 37세에야 첫 소설을 냈지만, 그때는 더 이상 조숙함의 보너스가 남아 있지 않았음
- 청년기가 사라지면 여행지, 역사, 우상과의 만남, 영화 장면도 가능한 삶의 목록이 아니라 놓친 가능성을 떠올리게 함
- 자녀의 성장까지 보며 청년기는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결국 남는 일은 자신이 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임
젊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욕망
- 20대 초반의 그는 18세부터 30세까지 이어지는 타임라인을 직접 그려 책상 위에 걸어둠
- Bret Easton Ellis는 21세, Martin Amis는 24세, Michael Chabon과 Zadie Smith는 25세, Philip Roth는 26세, John Updike는 27세에 첫 소설을 낸 위치에 붙여둠
- 자신의 얼굴 사진도 잘라 붙이고, 생일마다 한 칸씩 앞으로 옮김
- 목표는 단순히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어린 나이에 소설을 내는 것이었음
- 그는 신동, wunderkind, 뛰어난 젊은 작가가 되려 했음
- 30세 전 소설을 출간하지 못하는 일을 인생의 궁극적 실패처럼 받아들임
- 30세가 되고 31세가 되자, 더 이상 자신의 얼굴을 붙일 자리가 없어짐
청년기의 특권과 줄어드는 오차 범위
- 어떤 일을 젊을 때 해내면 위대함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작동함
- 잘한 일은 큰 잠재력의 증거가 됨
- 실수는 경험 부족의 결과로 여겨져 시간이 해결해줄 것으로 받아들여짐
- 나이가 들면 같은 실수도 더 이상 미숙함이 아니라 성격의 결함처럼 보임
- 19세의 나쁜 문장은 예상 가능하고 용서되지만, 45세의 나쁜 문장은 “이제는 더 잘 알아야 하지 않나”라는 평가를 받음
- 뛰어난 문장도 젊을 때는 경이롭지만, 나중에는 기본값처럼 취급됨
- John Updike의 Couples는 36세에 쓴 위대한 성취로 여겨지지만, 72세에 쓴 Villages는 그만큼 좋더라도 “Couples를 쓴 사람이니 당연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짐
- 시간이 흐를수록 실수할 수 있는 여백은 줄어들고, 결국 영구적인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함
출간되지 않은 초기 소설과 만료된 조건
- 그는 25세 전 소설 두 편을 완성했지만 둘 다 출간되지 않았고, 스스로도 좋지 않은 소설로 봄
- 젊은 사람이 쓴 소설답게 과장되고, 자의식적이며, 조잡하고, 자부심이 강한 모방작에 가까웠음
- 그중 하나는 일곱 살 소년이 학교 공책에 정교한 SF 스릴러를 쓰고, 교사가 원고를 발견한 뒤 월반하는 이야기였음
- 이후 괴롭힘, 짝사랑 등 성장소설의 익숙한 장면들이 이어짐
- 그는 그 이야기가 자신의 욕망과 노골적으로 닮았다는 점을 뒤늦게 인식함
- 성취 자체보다, 그것을 얼마나 어린 나이에 했는지로 보상받고 싶어 했음
- 어느 순간 그 조건은 만료됨
- 더 이상 젊지 않으므로 젊은 작가도 아니고, 뛰어난 젊은 작가가 될 수도 없게 됨
- 그래도 젊은 작가로 발견되고 싶다는 목표는 사라지지 않음
- 45세는 “발견”되는 사람이 아니라, 독성 폐기물이나 정치 스캔들처럼 “드러나는” 사람에 가깝다는 자조가 이어짐
가능성의 세계에서 고정된 삶으로
- 청년기가 지난 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고대 그리스, 미국 남북전쟁, 양자물리학, 우주의 역사 같은 책을 읽으며 세계의 광대함에서 위안을 얻음
-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자신이 역사 속 아주 좁은 순간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다고 봄
- 경험도 마찬가지로, 세월이 쌓일수록 세계를 얼마나 좁게 접하는지 알게 됨
- 젊을 때의 여행지는 모두 살 수 있는 곳이자 가능한 미래의 삶이었음
- Mexico, Hong Kong, France, Italy, Western Indiana 등이 새로운 삶의 후보처럼 느껴짐
- 결국 그는 한 여성을 만나고 한 장소를 선택함
- 그 선택은 “가장 좋은 여성과 가장 좋은 장소”였지만, 미래는 고정됨
- 세계는 여전히 좋지만, 더 이상 모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음
- 남는 질문은 가능성이 있던 자리를 무엇이 채우는가임
우상, 영화, 그리고 잃어버린 상상력
- 청년기에는 언젠가 우상을 만나 자신의 감사를 전하는 장면을 상상함
- 그 상상 속 자신은 늘 젊고, 유망하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람임
- 나이가 든 뒤 같은 상상은 불편해짐
- 예를 들어 45세가 Au Bon Pain 줄에서 Zadie Smith에게 눈물 섞인 찬사를 늘어놓는 장면은, 그녀가 실제로 세 살밖에 많지 않다는 점 때문에 더 기이하게 느껴짐
- Silence of the Lambs의 오프닝 크레딧은 청년기와 이후의 감각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등장함
- 젊을 때는 FBI 훈련소 숲을 달리는 Clarice Starling의 장면에서 앞으로 쓸 연쇄살인범 이야기, 성인이 되어 만날 사람들, 가능한 삶들을 상상함
- 이후 같은 장면은 쓰지 못한 이야기들, 글쓰기의 어려움, Thomas Harris의 고통스러운 집필 과정, Ted Tally의 이후 성공 부재를 떠올리게 함
- 같은 문화적 경험도 시간이 지나면 가능성의 상징에서 놓친 것들의 목록으로 바뀜
- 문화도 청년기를 잃는다는 감각이 덧붙음
37세의 데뷔와 조숙함 없는 평가
- 그는 결국 소설을 출간했고, 그날은 37세 생일이었음
- Updike보다 10년, Amis보다 13년, Ellis보다 15년 늦은 데뷔였음
- 모든 데뷔는 정의상 젊은 행위처럼 느껴지고 그의 데뷔도 그랬지만, 37세에 쓴 책에는 조숙함 보너스가 붙지 않음
- 누구도 나이에 맞춰 채점하지 않고, 조숙함에 매혹되지 않음
- 그 책은 37세가 쓴 또 하나의 책일 뿐임
- 나쁘지는 않고 괜찮을 수는 있지만, 위대하다면 왜 37세가 되어서야 썼느냐는 의문이 따라붙음
자녀의 청년기도 사라진다
- 애도하는 것은 자신의 청년기만이 아님
- 자녀가 생기면 그들의 청년기도 날마다 천천히, 보이지 않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게 됨
- 작아진 스노수트를 이웃에게 넘기거나, 잠자리에서 읽어주던 보드북이 기부된 사실을 알 때 강한 감정이 올라옴
- 네 살 딸의 발레 발표회에서 아이들이 무대 위를 서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 몸들에게 닥칠 좋은 일과 나쁜 일, 고통과 환희, 자기혐오와 자기수련을 떠올림
- 아이들이 걷고, 말하고, 읽고, 식당에서 주문하고, 거의 도움 없이 바나나 로프를 굽고, 비밀 생각을 일기에 쓰는 일은 축하할 이정표임
- 동시에 아이들이 Tooth Fairy를 믿고, 유령을 무서워하고, 공룡을 사랑하는 순수함을 오래 유지하길 바라게 됨
- 오래 붙잡을수록 잃을 때 더 아프다는 사실도 알고 있음
- 아이들의 청년기가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은 머리카락이 자라거나 마음이 깨지는 일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음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꾼다
- 뛰어난 젊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욕망은 단순한 자아도취가 아니라, 그에게는 생물학적 의무처럼 느껴짐
- 쓰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에서는 문단과 소설이 만들어짐
- 단어 자체가 아니라 단어의 본질, 언어의 요지, 글자 같은 형태와 색이 결합해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듦
- 그는 읽은 작가들의 몸 안에서 살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몸 안에서도 살고 있다고 상상함
- 그것이 이해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친밀감의 방식이었음
- 보이고,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은 젊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
- 나이가 든다는 것이 욕망을 벗겨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음
- 늙어가도 앞에 놓인 수십 년을 예민하게 의식하며, 그것을 무언가로 만들고 싶어 함
- 어리석은 꿈은 실현되지 않을 때만 어리석고, 버려질 때까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함
- 결국 그는 청년기를 천천히 빼앗기거나, 낙관적으로 말하면 그로부터 풀려남
-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를 끝없는 가능성은 “자신이 된 사람으로 사는 일” 하나로 좁아짐
- 남은 일은 잘라낸 얼굴을 한 칸씩 앞으로 옮기며, 더 살 삶이 없을 때까지 이 삶을 사는 것임
댓글과 토론
Hacker News 의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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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실수할 여지를 갉아먹고, 결국 아무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더 이상 실수는 미숙함의 결함이 아니라 성격의 결함이 된다. 젊다는 것은 늘 완벽함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 같지만 결코 닿지 못하고, 어느새 늙어 영구적인 불완전함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그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정말 강렬한 관찰임- 글과 댓글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가임. 여기 모인 사람들은 특히 “성취”라는 거대한 서사에 끌려온 부류이기도 함
불완전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아름다울 수 있음. 어쩌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이고, 타인과 진짜로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재료일지도 모름. 그렇게 받아들이면 모두 아름답고, 그러지 못하면 고문처럼 느껴질 수 있음 - 그 관점에 동의한다면 강렬하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음. 우리는 본성상 모두 불완전하고, 다르게 말하면 모두 죄인임
시간이 실수할 여지를 줄인다기보다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고 봄. 실수가 언제나 성격 결함은 아니며, 젊음은 사라지는 완벽의 이상을 쫓지만 나이는 더 깊은 자기 인식을 보여줌. 삶의 가치는 완벽이 아니라 수용, 감사, 사랑에 있음 - 반대로 볼 수도 있음. 불완전함을 영구적인 것으로 보고 자기 방식에 갇히기로 결정하는 순간 늙은 것임
계속 성장할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성장 가능함. 영원히 젊은 천재로 남을 수는 없지만, 나머지 이야기는 그렇게 암울하지 않음 - 젊음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가혹함. 글 전반도 그렇고, 30살이 되었는데 20대에 책을 내지 못했다고 해서 성격 결함이 있다고 할 필요는 없음
그래도 핵심에는 동의함. 젊을 때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고, 보통 위험을 감수해도 잃을 것이 훨씬 적음. 나이가 들수록 위험의 비용은 커짐
자기파괴적이지 않게 젊음을 생각하려면, 앞으로 1~3년 동안 나에게 젊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앉아서 생각하고, 그 정의가 손에 닿는 범위 안에 있도록 만드는 것도 방법임. 늙었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나쁜 건 그 감정에 더 깊이 기대는 것인데, 미디어와 TV가 사회 전체의 젊음을 대신 정의하려 하니 그렇게 하지 않기가 어렵다. 실제로는 각자에게 맞게, 가능한 한 늙어서도 젊음을 느끼도록 동기를 주는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함 - “10년 뒤인 1976년 Oxford의 박사후연구원 시절, 나는 야망이 퇴색하는 것에 대해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16~17살에는 또 다른 Einstein이 되고 싶었고, 21살에는 또 다른 Feynman이면 만족했을 것이며, 24살에는 미래의 T. D. Lee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1976년 Oxford에서 다른 박사후연구원들과 사무실을 함께 쓰며, 나는 프랑스에서 세미나 초청을 받은 옆방 박사후연구원을 그저 부러워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옵션 이론가들이 시간가치 감소라고 부르는 과정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금융 주식 옵션은 만기에 가까워질수록 잠재력을 잃는다.” — Emanuel Derman, My Life as a Quant
- 글과 댓글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가임. 여기 모인 사람들은 특히 “성취”라는 거대한 서사에 끌려온 부류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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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살인 지금 이 글의 많은 부분이 와닿지만, 이 대목은 내 생각에서 그대로 꺼낸 것 같았음
젊을 때 그는 휴가를 다르게 보냈다. 가는 곳마다 살 수 있는 곳이었고, 가능한 미래의 삶이었다. 여기서 살 수도 있겠다, 하고 생각했다. 혹은 저기서 여자를 만나 가족을 이루고 그곳의 시민이 될 수도 있었다. Mexico, Hong Kong, France, Italy, Western Indiana 등
결국 그는 한 여자를 만나고 한 장소를 골랐다. 최고의 여자와 최고의 장소를. 그리고 그의 미래는 고정되었다. 세상은 좋았지만, 더 이상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살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중년 이후의 많은 부분은 남은 날들이 유한하다는 깨달음 앞에서 의미를 찾는 투쟁임. 대체로 그럭저럭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위의 이유 때문에 여행에서는 아직 조금 힘듦. 예전에는 방문한 곳 어디서든 내가 거기 사는 모습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단순한 환상 이상의 가능성이 있었음
지금은 그렇지 않음. 아내와 내가 삶의 뿌리를 뽑아 낯설고 이국적인 곳으로 옮기는 건 엄청난 일이 될 것이고, 설령 그렇게 해도 모든 이국적이고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는 없음. 게다가 젊은 사람처럼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것도 아닐 것임- “그렇다면 가능성이 살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나는 36살이고, 이 문장은 내 가장 큰 두려움을 잡아냄. 한 여자가 즉시 완벽하지 않다면, 전 세계의 여성들과 살아오며 겪은 작고 아름다운 순간들로부터 영영 끊어질까 두려움. 완벽하지 않은 내 도시에 집을 사면 게임이 끝나고, 10년 이상 여기 묶일 것 같음. 사실 어차피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아름다운 아내이자 사랑하는 사람, 두 딸, 박사학위, 스타트업 직장을 가진 31살 친구와도 비슷한 대화를 했음. 그는 “이제 내 목표는 뭐여야 하지?”라고 했고, 답은 분명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는 것임. 그도 그걸 알고 행복해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그것은 젊음, 독신, 연구에서 중년, 가족 책임, 일로 넘어가는 거대한 변화를 보여줬음
“그는 집과 안정을 원하면서도 바다의 선원처럼 살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패배자여,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될 때” - 그 빈자리는 아이들이 채움
- 30대에 연애하는 남자로서는, 그가 “최고의 여자”를 고를 수 있었고 온라인 데이팅에서 곁에 남아줄 유일한 여자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 부러움
- 특정한 선택을 하면 그 자리에 올 수 있었던 다른 선택들은 사라지는 게 맞음. 하나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은 사라짐
하지만 어떤 가능성은 언젠가 현실이 되어야 함. 그렇지 않으면 전혀 살고 있는 게 아님. 삶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와 함께 사는 것임. 꿈꾸는 건 좋지만 사는 것과 같지는 않음. 현재 전체를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데만 쓰면 실제 삶은 갖지 못함
다시 말해 가능성이 있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실제로 살아가는 것임 - 그 나이에 나는 Philadelphia를 떠나 New Mexico 시골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살게 되었음. 10살 이후로 거의 전부 대도시에서만 살았음
그 이사 뒤로 나는 자원소방관이 되었고, 마을 단체 3곳의 이사회에 들어갔음. 하루치가 아니라 일주일치 장을 보는 법을 배웠고, 초록색이 더 이상 아름다움의 표시가 아닌 곳에서 내 풍경 미학도 다시 평가해야 했음. 적어도 해발 9000피트 아래에서는 그랬음. 말린 진흙으로 지은 집에 맞춰 건축 기술도 넓혀야 했음
이 삶은 젊었을 때 시작했던 어떤 삶만큼이나 새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음
- “그렇다면 가능성이 살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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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인 지금까지 나는 개울에서 사금 채취와 수문상자 쓰는 법을 배웠고, 지도·데이터 시각화·정부 데이터셋·API를 다뤄보려고 QGIS를 처음부터 익혔고, DJ를 배워 결혼 선물로 결혼식 3곳에서 DJ를 했고, 즉석에서 매시업과 리믹스를 만들며 깊은 기쁨을 느꼈음
전동공구를 마련해 차고 작업실에서 금속가공과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고, 용접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Facebook Marketplace에서 50달러짜리 용접기를 사서 대면 수업 없이 YouTube 대학만으로 익혔음. 이제 용접할 수 있고,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할 수 있다는 건 초능력 같아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림
20년 넘게 멀리했던 스키와 스노보드도 다시 시작했음. 새로운 것을 배우고 기술을 얻는 면에서 내 40대 초반은 창의성과 발견의 시기였고, 동시에 아이에게 좋은 부모, 배우자에게 좋은 남편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음. 이 성취들이 꽤 자랑스럽고, 어느 것도 커리어나 돈벌이와 관련 없음 -
이런 사고방식을 이해 못 하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사실 이해는 감. 다만 동의하기는 어려움
백만 명 중 하나쯤 이룰 성취를 향한 압박 속에서 사는 건 얼마나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까. 매일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 목표로 삼는 대신 말임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인정받는 기분이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하며 사는 듯함. 그 궁극의 쾌락을 좇다가 하루하루를 좋게 만드는 일을 잊어버림- 동의함. 그런 사고방식에 공감은 할 수 있음.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계획”으로 삶에 접근하는 걸 보지만, 나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음
올림픽 금메달, 팝 밴드 영웅 같은 성공을 몽상하긴 하지만 내겐 그저 몽상일 뿐임. “웃어야지, 안 그래?”라는 태도로 자랐고, 대체로 잘 통했음. 올림픽에는 못 갔지만 예전에 경주 몇 번은 이겼고, 소설은 출판되지 않았지만 쓰여 있고 현대 기술 덕분에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음
30살 전에는 가능성이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던 성공들로 나를 데려간 우연도 아주 많이 누렸음. 아주 늙은 건 아니지만 이것만은 앎. 좋은 삶의 열쇠는 좋은 친구들임 - 행복은 사람마다 다른 뜻을 가짐. 나는 어느 정도 저자와 비슷한 사고방식에 가까운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삶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도 이해함
때로는 인정받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고, 때로는 관련이 있음
- 동의함. 그런 사고방식에 공감은 할 수 있음.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계획”으로 삶에 접근하는 걸 보지만, 나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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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가 생각을 나눠준 건 고맙지만, 이 글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음
나는 이것이 나이 듦과 경직을 혼동하는 문제라고 봄. 나도 죽을 것이고, 하지 못한 일, 만들지 못한 것, 말하지 못한 것을 남길 걸 알고 있음. 몸도 여러 끔찍한 방식으로 망가지는 중임. 그래도 여전히 성장하고 배울 수 있음. 삶이 막을 내릴 때까지 모으고, 변하고, 형태를 바꾸며 살 생각임. 얼마나 짜릿한가
나이가 들수록 젊을 때 상상했던 전망들이 얕고 덜 익었다는 걸 보게 됨. 내 욕망을 비교할 대상도, 내 삶의 신화와 서사를 이해할 맥락도 없이, 초기에 노출된 미디어와 사회화만 가지고 얕은 것을 원했음
어떻게 바깥세상, 우연히 마주칠 풍요와 고통을 정말로 그려볼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짧게 살고, 우리가 딛고 있는 복잡성을 거의 맛보지 못한 채 어떻게 진실하거나 근원에 가까운 것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글쓴이의 한탄으로 돌아오면, 그가 좋은 예술을 만들지 못한 건 당연함. 진짜 것에 닿고자 하는 관심이 아니라, 진짜 것에 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이끌렸기 때문임. 여과되지 않은 경험의 취약성을,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거나 바라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딱딱한 믿음과 맞바꾼 것임. 그래도 아직 살아 있고, 아직 성장하고 변하고 예술을 만들 수 있다니 행운임
Tarkovsky의 Stalker와 Stalker의 기도가 떠오름. “약함은 위대한 것이고, 강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막 태어났을 때 약하고 유연하다. 죽을 때는 딱딱하고 무감각하다. 나무가 자랄 때는 부드럽고 휘어진다. 하지만 마르고 딱딱해지면 죽는다. 딱딱함과 강함은 죽음의 동반자다. 유연함과 약함은 존재의 신선함의 표현이다. 굳어버린 것은 결코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방식이 좋음. 다른 관점들은 믿기 어렵다. 기예 자체를 사랑하게 되면 시간, 인식, 나이 같은 건 훨씬 덜 중요해짐
나이가 얼마든 그 기예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적응시키는 데 더 관심을 갖게 됨
- 이 사고방식이 좋음. 다른 관점들은 믿기 어렵다. 기예 자체를 사랑하게 되면 시간, 인식, 나이 같은 건 훨씬 덜 중요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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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세상의 큰 문제들 앞에서 내가 무력하다는 좌절감을 담은 시를 써서 Facebook에 올렸던 기억이 있음. 마지막은 햇살 비치는 창문을 힐끗 보며 곁눈질로 “내 젊음이 그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걸 보는 식이었음
그게 인생의 절반 전임. 내 야망보다 내 우울이 “이게 다 무엇인지”를 더 잘 붙잡고 있었던 듯함
건강이 어떻게 버티는지, 우리 세대의 석면이 무엇으로 드러나는지에 따라 나는 이미 고비를 넘겼거나 곧 그 길로 가는 중임. 특별히 힘이나 체력이 좋았던 적은 없지만, 점점 줄어드는 건 느껴짐. 올해 수염에서 첫 흰 털도 봤음.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작은 노인처럼 보는데, 특히 너드 컨벤션과 대중교통에서 그렇음
그래도 내가 Leslie Jones 순간까지 기어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음. Shonda Rhimes 원칙을 따르려 하고, 진짜 나는 아직 잠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기보다 무언가를 쌓으려 함. 하지만 십대의 꿈과 어른의 현실 사이 균형을 유지하기는 어렵고, 어느 한쪽에 완전히 몸을 맡겨 무방비한 덩어리나 속이 빈 껍데기가 되는 건 말도 안 됨
이 사색이 고마웠음.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하자면,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기억하는 부모님 나이에 도달한 건 특히 정신이 번쩍 들게 했음. 지금쯤이면 나는 내 자신과 형제자매들, 그중 하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인생을 바꿀 700마일 이사를 준비시키고 있었을 텐데,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음 -
쓸데없이 우울하고, 침울하고, 암담하게 읽힘. 의미감은 여러 인간 욕구 중 하나일 뿐이고, 모두가 그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건 아님
이런 대목도 있음. “결국 그는 한 여자를 만나고 한 장소를 골랐다. 최고의 여자와 최고의 장소를. 그리고 그의 미래는 고정되었다. 세상은 좋았지만, 더 이상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살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성장, 기여, 다양성이라는 다른 기본 욕구를 채울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을, 중년에 성장과 기여와 다양성을 찾는 게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착각해서는 안 됨
기존 편견을 확인해주는 글을 특별히 강력하다고 부르진 않겠음. 나이가 들며 우울한 것과 힘을 주는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음. 나는 힘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힘을 주는 것에 “강력하다”는 말을 남겨두고 싶음- 이 말이 좋음.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본문과 잘 맞지 않는 듯함. 시간만 흘려보내고 자기 자신이나 상황을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정당화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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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을 성공 지표로 삼는 발상 전체가 수상하다고 봄. 15년 동안 출판으로 매우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든 사람으로서 하는 말임
나는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 즉 과학 논문을 냈지만 바탕에 있는 사회적 역학은 같다고 생각함. 작은 문지기 집단이 있고, 내 경우는 동료, 다른 경우는 출판사가 운명을 결정함. 그리고 그 결정이 반드시 어떤 객관적 가치에 근거하는 건 아님
사실 소설에서 객관적 가치라는 개념 자체가 꽤 의심스럽다고 봄. 개인적으로는 대부분의 소설을 읽기 힘들고, “문학소설”은 특히 그렇음. 허세가 강하고, 읽어서 실제 가치를 얻기보다는 미덕 신호로 설계된 것 같음. 책꽂이에 꽂아 사람들이 읽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에 가깝다. 논문도 그 논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인용하는 게 아니라, 인용하는 논문의 저자가 심사위원회에 있기 때문에 인용하는 것과 비슷함
전부 정치라는 건 아니지만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정치임. 좋게 봐도 문학의 황제는 끈팬티 정도는 입고 있음- 맞지만, 그건 업계 베테랑의 관점이지 “떠오르는 작가”의 관점은 아님. 우리는 사람들이 우스운 게임을 할 능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덕성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서사를 갖고 있고, 특히 이상주의적인 편이면 그걸 꿰뚫어보기까지 시간이 걸림
- The Silence of the Lambs를 어떤 성취의 전범처럼 세운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음. 어릴 때 한 번 봤고, 거기서 나온 밈과 대사는 알아보며, 문화 속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앎
하지만 그 외에는 그 영화를 생각하지 않음. 특히 20~30년 뒤인 지금은 더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없어도 괜찮았을 것임. 다시 볼 계획도 전혀 없음
저자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똑같이 말할 거라고 확신함. “누가 신경 쓰나? 없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교훈은 자신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자기 개인의 관점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임. 저자가 어디서 오는지는 이해하고, 이 블로그 글에는 아주 잘 쓴 문장들도 있음. 하지만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건 불행으로 가는 처방이라고 생각함. 하나의 관점일 뿐 절대 진리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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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쓰는 즐거움을 위해 쓰면 안 되는가? 왜 반드시 역사상 최고의 소설을 써야 하는가. 나는 지금 삶에서 그 지점에 와 있음
위대하거나 최고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즐거워서 하고, “여정”을 위해 하는 것임. 최고가 되려 하면 필연적으로 번아웃으로 이어지고,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지도 않음. 세계 챔피언들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걸 자주 봤음. 전 세계가 인정하는 소설을 썼다면, 그다음은 무엇인가?
여행 이야기도 공감되지 않음. 내게 여행은 살 곳을 쇼핑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배우고 경험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며 문화와 사람을 배우는 기회임
우상으로 삼는 사람을 여전히 만날 수 있음. 그들은 아마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매우 숙련된 사람들일 것이고, 우상을 만나는 건 그들에게 배울 기회라서 신나는 일임
다만 나이 드는 것은 힘듦. 내가 힘든 건 더 느려지고, 더 피곤하고, 더 약해지고, 어쩌면 창의성도 줄어드는 것임. 일상의 즐거움이 줄고, 개인 목표에 도달할 기회도 적어짐- Schopenhauer의 “On Authorship”을 좋아할 수도 있음
<https://www.gutenberg.org/files/11945/11945-h/11945-h.htm#li...>
- Schopenhauer의 “On Authorship”을 좋아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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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뛰어난 젊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 어리석은 욕망은 이기적인 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물학적 의무였다”
나도 20대에 같은 것을 겪었음
나이가 들수록 그런 욕망은 사라진다고 생각함. 또한 생물학적 동기가 크게 작용한다고 의심함. 좋은 짝으로 보이기 위해 뭔가 특별한 일을 하려는 것일까? 개인적 트라우마, 예를 들어 낮은 자존감 같은 것도 가능함- “열정적인 마음 상태는 종종 기술, 재능, 힘의 부족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열정적 강도는 숙련과 힘의 소유에서 나오는 자신감을 대신할 수 있다. 자기 기술을 확신하는 노동자는 느긋하게 일을 해내며, 마치 놀이처럼 일해도 많은 것을 성취한다. 반면 자신감이 없는 노동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처럼 일에 달려들고, 무언가를 해내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군인도 마찬가지다. 잘 훈련되고 잘 장비된 군인은 강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잘 싸운다. 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군인은 열의와 열정에 의해 움직일 때만 제 몫을 한다.” — Eric Hoff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