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안 쓰는 시대
(dansinker.com)- Chicago Sun-Times와 Philadelphia Inquirer가 인공지능 챗봇이 만든 가짜 기사와 책 추천이 담긴 부록을 아무 검증 없이 출판한 사건이 발생함
- 이 사건은 미디어, 제작자, 비즈니스, 독자 등 모두가 신경쓰지 않는 태도를 드러낸 대표적 예시임
- 인공지능이 평균적이고 무난한 결과물을 대량 생산하면서, "충분히 그럴듯한" 것이 표준이 되어감
- 사회 전반적으로 콘텐츠와 정부, 조직 등에서도 중요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음
- 이러한 현실에서 사람이 신경을 쓰고, 직접 창조하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행동임
서론: 신경 안 쓰는 시대의 상징적 사건
- 이번 주 초, Chicago Sun-Times와 Philadelphia Inquirer가 외부업체가 제작한 "특별 부록"을 실었는데, 여기 실린 모든 사실, 전문가, 책 제목이 인공지능 챗봇이 완전히 만들어낸 허구임이 드러남
- 많은 비평이 있었으나, 저자는 이 모든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진짜로 신경쓰지 않은 점이 가장 실망스럽다고 언급함
미디어와 제작 현장: 무차별적 무관심
- 글을 쓴 사람, 편집자, 비즈니스 관계자, 제작자 모두 그저 넘어감
- 그 결과, 실제로 이 문제가 독자에게 밝혀지기까지 이틀이나 걸렸음
- 사실상 독자조차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음을 의미함
지금의 미디어와 AI: '적당히'의 시대
- 이런 사태는 그저 무심코 소비되는 값싼 콘텐츠가 범람하는 현 시대의 상징임
-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평균적 수준의 결과를 대량 생산하는 "평범함의 기계"임
- 엄청나게 많은 자원 사용에도 "충분히 그럴듯한 모조품"만 제시함
- 실제로 대부분 사용자는 '적당히 괜찮음' 정도면 만족하며, 인공지능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배경이 됨
신경 안 씀의 확산: 미디어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
- 인공지능만의 문제가 아님
- 저자 자신도 심도 깊은 프로젝트를 기획하려 했으나, 기업의 요구로 단순하고 대중적인 콘텐츠로 변질됨
- 결국 대부분의 콘텐츠가 허락되는 수준에서 그치며,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는 외면당함
'무심코 소비'되는 콘텐츠의 시대
- Hanif Abdurraqib은 멀티태스킹 하면서 듣는 콘텐츠의 폭증을 언급함
- 예전엔 시간과 자본을 아낌없이 투자한 심도 깊은 작품도 가능했지만, 현재는 불가능한 상황이 됨
- 이런 콘텐츠조차도 24시간 뒤에 사라지는 임시적인 형태로 존재함
사회 시스템, 정부의 '무관심'이 심화
- 정책, 공공분야, 행정 등에서도 '신경 안 씀' 이 만연함
- 정부와 조직들은 서둘러 대체, 자동화, 인공지능 코드 도입에 집중하며, 진짜로 헌신하고 관심 가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대체하려 함
개인 경험: 진정성 상실의 좌절
- 저자가 최근 수백 건의 지원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AI 챗봇이 생성한 뻔한 문구들이 반복적으로 발견됨
- 인공지능이 개인 고유의 경험, 감정을 대신 작성하면서 고유성과 진정성이 상실됨
인간의 가치: 신경씀과 창의
- 하지만 사람이 진정성을 담아 쓴 지원서는 완전히 달랐으며,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 예측 불가능성이 살아 있었음
- 이런 글은 분명한 인간성이 느껴지는 창작물이었음
결론: '신경쓰기'의 적극적 실천이 가장 혁신적 행동임
- "신경 안 쓰는 시대"에선 '신경씀' 자체가 가장 급진적이고 가치 있는 행동임
- 기계가 만든 평범함이 가득할 때, 스스로 불완전하거나 거칠어도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 의미를 가짐
- 주변에 신경 쓰는 사람들, 창의적으로 만드는 이들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주목함이 사회 변화의 시작임
- 실제 콘텐츠를 온전히 집중해서 듣고, 휴대폰을 멀리 두고 시청하며, 종이 잡지나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함
- 스스로가 되고, 불완전해질 것, 인간임을 인정하고 신경쓰는 것이 이 시대의 가치임
Hacker News 의견
-
나도 오늘 아침 식사 중에 파트너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투덜거림을 보임. 꼭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그렇게 성실하지 않은 것 같음. 내 작은 가스 누출을 더 크게 만든 뒤 떠난 유틸리티 기술자, 6년씩 걸리는 주차장 신축 건물, 최소한만 일하려는 경찰, 도로 표지판 없는 동네 (여긴 변두리도 아닌데, 보스턴임), 하루 2시간만 일하고 헬스장 가고 놀러 다니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시청 직원 지인 등 다양한 사례가 있음. 무관심과 평범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임. 최근 들어 이게 AI 덕분에 자부심 없는 이들이 더 쉽게 대충 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같음. 목표가 뭔지도 모르겠음
-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문화가 (최소한 미국에선) 많이 약해졌음. 대기업들이 직원들을 챙기는 척조차 안 하고 오히려 미워하는 경우도 많아졌으니, 그런 곳에서 자부심을 갖고 일하기란 힘든 상황임
-
현상에는 두 가지가 작용함. 첫째, 사회 전반에 뚜렷한 방향성이 없어졌음. 둘째, 교육이나 가족, 종교 등 기존에 중요하게 여겼던 방향과 우선순위를 받아들이지 않음. 누구나 자신만의 새로운 소속감을 찾아야 하는 시대임. “신은 죽었다”라는 말처럼 사회 전반의 인식이 분열됐고, 사회를 일관되게 움직이게 할 가치는 점점 사라짐. 결국 큰 틀의 집단적 행동을 이끌 방법이 없음
-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능숙하지 않은 것이 혹시 Peter principle(피터의 원리,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 수준까지 승진한다는 이론)와 비슷한 현상인지 생각함. 이 이론도 오래전(1969년)부터 있어온 이야기임. 그래서 더더욱 유능한 사람을 발견할 때의 감탄이 특별하게 다가옴. 내 집을 5시간 동안 철저히 검사해준 홈 인스펙터를 보고 감동했던 경험이 있음. Peter Principle 링크도 참고하면 좋음
-
내가 보기엔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근본적인 원인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로 이어진 오랜 문제임. 인플레이션 탓에 모든 게 조금씩 더 나빠지고 기업들도 비용 절감, 인건비 절감, 해외 아웃소싱에 집중하게 됨. 임금은 오르지 않고 물가기만 오르는 현실에선 열심히 일할 동기가 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믿음도 사라짐. 기술 발전과 생산성 향상으로 최악은 막았으나 그 이익 대부분이 주주에게만 돌아감. 결과적으로 점점 더 얇아지는 비누, 적어지는 햄버거 패티처럼 계속 고생만 하게 됨. 역사적으로도 이런 문제의 쉬운 해법은 없었고, 변혁이나 전쟁이 대개 뒤따랐음. 아마도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 열풍은 이런 상황(비트코인의 디플레이션 성향) 때문일 수도 있음
-
이는 직장에서 사람들이 닥치게 되는 경제적 기회 구조의 결과임. 일을 더 잘 한다고 해서 더 많은 보상을 받지는 못함. 실질적으로 연봉은 나이가 증가함에 따라 따라가는 경향이고, 평가와 보상 조정이 너무 느려서 본인이 잘 일한 게 급여에 반영된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만 일하게 됨. 결국 이직만이 더 많은 연봉을 얻을 유일한 방법이 됨. 이런 현상을 해결하려면 임금 격차 확대와 ‘난 내 할 일만 한다’는 심리를 버리는 것이 필요함. 특히 공공부문에선 어렵겠지만 말임
-
-
꼭 이 댓글을 남기고 싶음. 신원이 드러날까 세부 내용은 빼겠음. 나는 시니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입사했는데, 함께 작업하라는 다른 시니어 엔지니어가 해당 분야 배경이 없음을 알게 됨. 매니저, 테크 리드에게 여러 번 얘기하고 자료도 보내줬으나, 내 말은 의견일 뿐이라며 무시당함. 결국 열띤 논쟁만 반복하다가 팀 이동까지 요청함. 나중엔 내 테크 리드도 실력이 기대만큼 아니란 걸 깨달음. 그래서 Reddit과 TeamBlind에서 상황 조언을 구했더니, 거의 모든 답변이 “상관없잖아, 월급 받고 집에 가자”는 식이었음. 이 답을 보고 ‘아, 이게 정답이구나’ 하고 나 역시 그냥 월급 받고 내 할 일 열심히 하며, 남는 시간에 사이드 프로젝트와 Leetcode에 집중하는 쪽으로 태도 전환함. 8년이나 지나서야 이 업계에서 필요한 마인드를 배움. 이제는 “Who The Fuck Cares” 클럽 소속임
-
팀 수준이 낮다는 걸 깨닫고, Reddit 같은 냉소적인 집단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 말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게 맞나? 만약 인생에서 ‘신경 안 쓴다’는 태도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 인터넷 익명 의견조차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됨. 나는 그보단, 지적이고 열정 넘치는 동료들과 능력 있는 창업자들이 있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게 더 삶의 만족을 준다는 걸 경험함. 이런 환경에서 배우는 것도 더 많고, 더 잘 성장하고, 자기자신에 대한 뿌듯함도 커짐
-
첫 직장에서 2시간만 일하고도 회사에 중요한 외주 프로젝트 덕분에 큰 소리치는 개발자, 자기만 알 수 있게 엉망인 스크립트로 인프라 관리해서 누구도 역할을 넘겨받기 힘들게 한 devops, 며칠씩 사소한 버그를 붙잡는 주니어(결국 시니어가 15분 만에 처리), 결과를 측정할 필요 없이 그저 “다 잘됐다”고만 하면 관리자가 만족하는 테스터 등 다양한 사례를 짧은 기간에 봄. 그래서 나도 WTFC(Who The Fuck Cares) 캠프에 입성함
-
조금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싶음. ‘신경 꺼라’는 본능은 내 정신건강을 보호하는 데만 씀. 일에서 마음을 내려놨더니 그 태도가 내 사생활로까지 번지는 걸 느꼈음. 일과 사생활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 난 내 삶을 위해 신경 씀. 더 열심히 일해서 자기방어 할 필요도 줄고, 일 때문에 사생활에 침범이 심해지면 그때만 “무관심 클럽”에 들어가 쉬는 식으로 밸런스를 찾음
-
동료가 내 일에 직접 악영향을 주지 않는 한 걱정하지 않음. 업무 질 평가 체계를 만들 책임은 회사에 있음. 남이 저지른 일을 내가 뒤집어쓸 뻔할 땐 팀원으로서 확실히 지적하고 책임 전가를 막는 정도만 하면 충분함
-
몇 번째인지 모르게 몇 달, 몇 년 한 일이 결국 아무 쓸모도 없이 폐기되는 걸 경험한 뒤로, 진심으로 “신경 쓰는 게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우린 그냥 기묘한 사업적-형이상학적 플링코 보드 위의 부품일 뿐임. 리더십도 결국 똑같이 ‘척하는 것’에 불과함
-
-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은 ‘신경 쓰는 것’임. 무관심하면 뭐든 상관없으니 마음이 편함. 나도 10대 때 이런 쿨한 척 “난 신경 안 써”라며 방어기제를 키웠지만, 사실은 신경 썼음. 어른이 돼보니, 진짜 필요한 건 신경 쓸 강함임. 최근엔 타인을 이해하려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옳다고 확신하게 됨. 반대로 신경을 끄고, 타인을 차별하고 공개적으로 웃음거리로 삼는 태도는 정말 매력 없는 사람을 만드는 핵심임. 무엇에 신경을 끌지 반드시 조심해야 함
-
너무 신경을 써서 불안과 두려움이 큰 경우도 있음. 인생은 혼돈 그 자체라 흐름을 따라가는 법도 필요함. 중요하게 신경 써야 할 것과, 수건 정리나 컵받침 물자국처럼 대수롭지 않은 건 구분할 줄 알아야 함. 모든 일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면 일상이 전쟁터가 되니, 각자의 “적정선”을 잘 잡아야 함. 적게 신경쓰면 무감정해지고, 지나치면 불안에 짓눌리니 균형이 필요함
-
아테네의 투키디데스는 자기 사적 이익만 생각하고 사회와 공공 이슈에 관심 없는 시민을 ‘idiotes(ἰδιώτης)’라 부름
-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결정하는지 궁금함
-
-
미래는 사라진 느낌임. 50대 중반으로 지금까지는 항상 미래를 상상하고 준비해왔는데, 최근에는 미래 자체가 없어진 느낌임. 이게 나이 때문인 줄 알았지만, 세상 전체도 그런 분위기임. 회사들조차 더 이상 명확한 미래 비전을 얘기하지 않고, AI와 관련한 두려운 전망만 반복함. 사회는 변화가 빠르긴 하지만, 그 변화가 특정 목표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음. 스마트폰, 컴퓨터, 영상 스트리밍, 게임처럼 최적화만 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음. AI 역시 이상하고 무섭기만 하고, 진짜 새로운 카테고리는 안 보임. 그저 무한 최적화만 진행되고 있음
-
이런 착각을 깨는 방법은 신기술이 처음 나올 때를 떠올리는 것임. 비트코인도, 페이스북, 해커뉴스, 아이패드, 스마트폰도 처음엔 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음. 십 년쯤 지나 보면 과거엔 느끼지 못했던 진짜 혁신을 깨닫게 됨. AI도 마찬가지임. 당장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이 온다고 생각하진 않음. 낙관적인 마음을 갖는 게 좋음. 삶은 충분히 좋음. 흑사병 같은 재앙을 치료할 수 있고, 겨울에도 과일을 먹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쉽게 이동하고, 출산 사망률도 크게 줄었음. 기술의 물리적 기적은 종종 더 엄청남. 컴퓨터도 100년 안팎밖에 안 됐음. 낙관적으로 봐야 함
-
나도 30대 후반인데, 비슷한 느낌을 가짐. 뭔가 변화는 있지만 신선함이 안 느껴짐. 리메이크와 유행의 반복, 단조로움 등으로 세계가 ‘정체’된 느낌
-
향후 5, 10, 30년에 뭘 겪게 될지 누구도 모름. 오히려 지금과는 엄청 다르고, 반드시 나빠진다는 보장도 없음. 미래엔 급진적 개선이 일어날 확률도 무시할 수 없음. 예를 들어 노화 치료가 나올 수도 있고,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되살아날 수도 있음.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미래의 부정적 측면만 생각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지 않는 게 좋음. 변화가 나쁘더라도 상상 못한 좋은 것들도 함께 찾아와 결과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음
-
40세에 가까워지며 느끼지만, 지금 세상이란 건 로마인들이 황금기 초입부터 자신들의 문화가 무너진다고 한탄하던 현상과 비슷함. 항상 “예전이 더 좋았다”고 함. 일부는 의미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착각임. 이제는 문명 현실에 더 눈떴다고 봄. 더는 레이저 유니콘 파워 같은 미래는 없고, 현실적 문제(기후, 불평등, 정치제도 개선 등)를 받아들여야 함. 오히려 이런 사회적 우울감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음
-
60대인데, 나는 오히려 미래가 이미 도착했다고 느낌. 대학 입학 에세이에서 언젠가 인공 지능이 생물학적 지능을 뛰어넘을 거라 썼었는데, 그 지점에 가까워짐. 무섭고 이상하지만 동시에 ‘풍요와 불멸’ 가능성도 열려 있음. 앞으로 더 흥미로워질 것임
-
-
사람들이 ‘좋은 거래’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더 신경 써서 일함. 영국 사례를 보면, 작은 도시 사람들이 더 친절한 건 월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고, 최소한 집이나 차 정도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상황 덕분임. 반면 런던에서 커피숍 일 하는 사람은 돈이 없으면 작은 방에서 생활비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많이 느낌
-
“좋은 거래”일 때 사람들이 신경 쓰고, 나쁜 거래는 반대로 무관심하게 만드는 근본 이유임
-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고, 특히 런던처럼 금융·테크·법률 외 업종에선 매니저급도 집 소유가 불가능함. 주택이 너무 비싸서 월세만 내고 평생 자기 집 없이 일하다 죽는다는 인식이 퍼짐. 그래서 뭐하러 노력하냐는 심리가 일반적임. 좋은 삶의 비용이 대다수 인구에게는 이미 너무 비싸진 상태임
-
-
이런 주제글의 한계는 사람들이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와 그 이유, 즉 가치에 관한 근본적 논의를 빼먹는 점임. 예를 들어, 신문사가 AI로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게 정말 문제인지? 그리고 왜 평범한 회고록이나 멀티버스 오디오 특강에 관심 가져야 하는지, 혹은 고객응대에서도 ‘관례적 질문엔 관례적 답변’만 반복하는 게 왜 나쁜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설명이 없음. 결국 우린 의미와 목적이 긴 시간 비워진 혼란 속에 방황 중임
- 네 말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게 사회에 대한 반항’("In a society that profits from your self doubt, liking yourself is a rebellious act.")이란 명언을 떠올리게 했음. “펑크”란 결국 세상이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사는 것이라고 봄. 신경을 쓰는 것도 결국 본질적으론 ‘펑크’임. 꼭 특별한 이유나 동기가 필요한 게 아님. 남다른 성취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함임
-
사람들은 신경을 씀, 단지 자기 이익과 돈에만 더 치중할 뿐임. 지난 40여 년간 각자도생 논리에 따라 시장만 믿으면 다 잘 풀릴 것이라는 이야기가 반복됐음. 그러나 결국 최소한만 하며 순응만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게 드러났음
-
최소한만 일하는 무관심 방식은, 돈을 내는 사람·평가하는 사람·처벌하는 사람이 모두 각각 따로 존재하는 구조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현상임. 정부 조직이 대표적임. 납세자는 비용만 내고, 실질적 서비스에 의견을 반영할 수 없음. 성과도 평가받지 않고, 결국 시민은 불만족스러운 결과만 경험하게 됨
-
관료주의와 통계 중심 문화로 인해, 개인이 신경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별로 본인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거의 없게 됨. 효율적 보상·인센티브가 사라진 사회의 산물임
-
-
결국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임. 예전엔 지적 성취가 롤모델이었고, 근면·겸손·타인 존중이 강조되는 사회였음. 외부 영향도 적었음. 이제는 TV스타, SNS로 대표되는 과장된 바디 이미지 등이 아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침. 맞춤법조차 앱이 대신하고, 간편식 조리가 요리보다 쉬움. 이런 기술 발전은 대중의 지적 능력을 깎아먹는 결과이기도 함. 기술 커뮤니티인 우리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느낌. 해법은 모르지만, 저자가 제안하는 것—‘신경 쓰기’—가 시작일 수 있음
-
“모든 증강은 곧 절단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음. 어떤 혁신은 단순 진화일 뿐 기존을 완전히 대체하진 않지만(타자기 vs 워드프로세서), 너무 오래된 지식은 몰라도 무방하고(직접 버터 만들기 등), 반대로 사라지면 곤란한 필수 기술(책 읽기 같은)도 있음. 이것을 인지도(X축)와 필요도(Y축)로 그래프로 표현해 볼 수도 있을 듯
-
내 세대에선 Jackass와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어른들의 삶을 도피하고자 하는 꿈을 줬음
-
과거엔 근면·겸손·존중이 중요한 가치였지만, 외부 영향이 확대되니 “열심히 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많이 알게 됨. 사실 옛 가치란 것도 ‘현실 현상에 순응하라’는 일종의 자기 위로였을 수 있음. 이제는 고용주들이 그런 가치를 별로 보상해주지 않으니, 사람들이 더는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됨. 극복책으로 과거의 가치를 다시 내세우는 건 효과가 떨어질 것임
-
-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최근 “평균에 수렴하는 사회” 현상 관련 링크를 모아두곤 했음. 평균적인 것만 계속 재생산하면 결국 모든 게 평범해질 수밖에 없음. 반면 예술가, 뮤지션, 박물관 등은 여전히 대단하고 독창적인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니, 해커뉴스 같은 데서도 매일 그런 사례를 봄. 그래서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거칠지만 독창적인’ 걸 만들어볼 기회가 된다고 봄. 저자의 관점이 너무 비관적이지 않은지 싶음
- 해커뉴스만 봐도 매일 엄청난 창작물과 노력이 넘쳐남. 역사적으로 다른 시대와 진짜 공정하게 비교할 방법은 어려운데, 이를테면 농장 노동자, 작가 등 시대마다 기록이나 평판을 수치로 비교할만한 분야에서 해법을 찾아볼 수도 있겠음
-
미국 대중의 ‘바보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임. 특히 일반 유권자들이 다수라 더 큰 문제가 됨. 난 대학은 안 나왔지만 독서를 좋아하고 무엇이든 의심하며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지금까지 큰 불만 없이 살아옴. 하지만 수많은 동료 중 배움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독서하는 사람도 거의 못 봄. 오히려 책 왜 읽냐고 묻거나, “그건 공부해도 쓸 데 없다”고 하는 경우도 많았음. 지식이 왜 중요한지 사회 전체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임
-
우리 어머니는 TV 볼륨을 조정하는 법도 평생 배우려 하지 않으셨음. 아버지가 병원에 가면서야 차에 주유하는 법을 배움.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배우려 하지 않는 태도는 정말 신기함
-
오히려 사람들이 책 같은 긴 글보다 트윗, 페이스북, 짧은 동영상 등 단문이나 영상 콘텐츠를 더 많이 보는 시대임. 예전과 방식만 달라졌을 뿐, 읽는 것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닐 수도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