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mmy Carter 별세
(washingtonpost.com)- 미국 39대 대통령 Jimmy Carter가 2024년 12월 29일 Georgia주 Plains 자택에서 100세로 별세했으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장수였음
- 1976년 당선된 Carter는 스태그플레이션·에너지 위기·Iran 인질 사태가 겹친 재임기를 보냈고, 1980년 Ronald Reagan에게 큰 표차로 패배해 단임에 그침
- 재임 성과는 실패 이미지에 가려졌지만 Camp David Accords, Panama Canal 조약, 중국과의 수교, 인권 중심 외교, Energy·Education 부처 신설 등이 남아 있음
- 퇴임 뒤에는 Carter Center와 Habitat for Humanity, 선거 감시, 분쟁 중재, Guinea worm disease 퇴치에 40년 넘게 참여했고 2002년 Nobel Peace Prize를 받음
- 말년의 평가는 화석연료 감축, 인권, 인종 문제, 법관 다양성에서 시대를 앞선 대통령이었다는 쪽으로 점차 수정됨
100세로 별세한 미국 39대 대통령
- Jimmy Carter는 2024년 12월 29일 Georgia주 Plains 자택에서 별세했으며, 아들 James E. Carter III가 사망 사실을 알림
- 사인은 즉시 공개되지 않았고, Carter Center는 2023년 2월 그가 여러 차례 입원 뒤 추가 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음
- 최근 몇 년간 간과 뇌로 전이된 공격적 형태의 melanoma 피부암 치료를 받았음
- 부인 Rosalynn Carter는 2023년 11월 19일 96세로 별세했으며, 두 사람은 77년 넘게 결혼 생활을 이어가 미국 대통령 부부 중 최장 결혼 기록을 남김
- 유족은 자녀 Jack, Chip, Jeff, Amy와 손주 11명, 증손주 14명임
- Carter Center는 Atlanta와 Washington에서 공개 추모 행사를 열고 Plains에서 비공개 안장을 진행할 예정임
- Joe Biden 대통령은 1월 9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함
- 연방 건물과 군사 시설의 미국 국기는 30일간 조기 게양됨
단임으로 끝난 재임기
- Carter는 소도시 땅콩 농부, 미 해군 출신, Georgia 주지사를 거쳐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됨
- 1837년 이후 Deep South 출신 첫 대통령이었고, Lyndon B. Johnson과 Bill Clinton 사이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유일한 민주당원이었음
- 재임 기간에는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했지만, 미국 사회는 점점 보수화되고 있었음
- 1980년 재선 도전에서는 보수 정치의 상징이 된 Ronald Reagan에게 큰 표차로 패배함
경제·에너지 위기가 만든 실패 이미지
- 퇴임 직후 Carter는 널리 평범하거나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음
- 재임기는 정체된 경제,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겹친 시기였음
- 비판자들은 낮은 성장과 높은 물가를 뜻하는 stagflation을 Carter 경제 정책 공격에 사용함
- 1979년 Iran 혁명으로 세계 석유 공급이 흔들리면서 미국인들은 주유소에서 긴 줄을 섰고, 휘발유 공급은 줄고 가격은 상승함
- Carter는 에너지를 핵심 국내 정책으로 삼아 일부 성과를 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잇달아 개입함
- 1979년 3월 Pennsylvania주 Harrisburg 인근 Three Mile Island 원전에서 노심 용융 사고가 발생함
- 이 사고는 미국 원자력 산업 최악의 사고였고, 원자력이 석유와 화석연료의 안전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큰 타격을 줌
Iran 인질 사태와 외교 위기
- 1979년 11월 Iran 군중이 Tehran의 미국 대사관을 장악하고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잡음
- 인질 사태는 444일 동안 이어졌고, Carter가 퇴임한 1981년 1월 20일에야 끝남
- 1980년 4월 Carter가 승인한 구출 작전은 Iran 사막에서 미국 항공기 2대가 지상 충돌해 미군 8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끝남
- 작전에 반대했던 국무장관 Cyrus R. Vance는 사임함
- Carter는 2018년 인터뷰에서 마지막 해에 인질들의 곤경을 지나치게 강조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들과 가족들에게 개인적으로 몰두해 안전하게 귀환시키고 싶었다고 밝힘
- Iran 인질 사태 한 달 뒤 Soviet Union은 Afghanistan을 침공함
- Carter는 Soviet Union에 대한 곡물 판매 금수 조치를 명령해 미국 농민들의 반발을 샀음
- 1980년 Moscow 하계올림픽 미국 보이콧도 명령했지만, 많은 미국인에게 인기 없고 약하며 효과 없는 조치로 받아들여짐
재평가된 대통령 기록
- 시간이 흐르며 Carter의 대통령직에 대한 평가는 더 긍정적으로 바뀜
- 말년에는 재임 기록이 주유소 긴 줄과 Iran 인질 사태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인식이 넓어짐
- Jonathan Alter의 2020년 전기 His Very Best: Jimmy Carter, a Life는 Carter를 “미국 역사상 가장 오해받은 대통령일 수 있다”고 평가함
- Kai Bird의 2021년 전기 The Outlier: The Unfinished Presidency of Jimmy Carter도 Carter가 많은 이들이 인식한 것보다 더 중요한 대통령이었다고 봄
- 두 전기는 Carter가 특히 다음 영역에서 시대를 앞섰다고 평가함
- 화석연료 사용 감축에 대한 초기 관심
- 인종 갈등 완화 노력
- 연방 법관직에서 유색인종 수 확대
- Carter의 나쁜 평판은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도 옳다고 생각한 일을 고집한 데서 크게 비롯됐다는 평가도 있음
Camp David Accords와 주요 외교 성과
- Carter의 끈질김과 결단력은 재임기의 대표 성과인 Camp David Accords 달성에 중요하게 작용함
- 1978년 9월 Carter는 Maryland주 Catoctin Mountains의 대통령 별장에서 13일 동안 머물며 Israeli Prime Minister Menachem Begin과 Egyptian President Anwar Sadat 사이를 오감
- 여러 차례 결렬 직전까지 간 과정에서 Carter는 오랜 적대국 사이의 역사적 합의를 중재함
- Camp David Accords는 1967년 Six-Day War에서 점령된 영토에서 Israel의 첫 중대한 철수로 이어졌고, Israel과 최대 Arab 이웃 국가 Egypt 사이의 평화조약으로 연결됨
- Begin과 Sadat는 1978년 공동으로 Nobel Peace Prize를 받았고, Carter는 24년 뒤 평생의 평화 활동으로 같은 상을 받음
- 강한 보수 진영 반대를 뚫고 Panama Canal 조약도 추진함
- 조약은 경제·전략적으로 중요한 수로를 최종적으로 Panama 통제하에 두는 내용이었음
- Latin America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향한 큰 조치로 평가됨
- Soviet Union과 핵무기 감축 조약 SALT II에 서명했지만, Soviet Union의 Afghanistan 침공 뒤 상원 심의에서 철회함
- Richard M. Nixon이 만든 개방 흐름을 바탕으로 중국을 정식 외교 승인함
- 인권을 미국 외교정책의 중심 주제로 삼아 Nixon과 Henry A. Kissinger의 접근과 뚜렷이 달랐음
국내 정책과 환경 의제
- Carter 재임 중 Cabinet급 부처인 Energy와 Education이 신설됨
- 독성 폐기물 부지를 정화하기 위한 Superfund가 만들어짐
- Alaska National Interest Lands Conservation Act는 국립공원과 야생동물 보호구역 체계 규모를 두 배 이상 확대함
- 환경 문제에서도 시대를 앞선 행보가 있었음
- 1979년 6월 White House West Wing 지붕에 태양광 패널 32개를 설치함
- 그는 외국 석유에 대한 “심각한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양의 힘을 활용하려 한다고 말함
- Reagan은 1986년 이 패널들을 철거함
- 의회와의 관계는 종종 긴장됐지만, Carter는 현대 대통령 다수보다 입법 제안 통과에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둠
- 항공과 트럭 산업 규제 완화는 Reagan과 보수 진영 아래 더 힘을 얻은 흐름을 시작함
- Reagan 시기 Soviet Union 붕괴를 앞당긴 것으로 자주 평가된 군사력 증강은 Carter 시기부터 시작됨
- Carter가 Federal Reserve 의장으로 임명한 Paul Volcker는 Reagan 재임 초반 인플레이션을 꺾은 인물로 나중에 평가받음
퇴임 후 40년 넘게 이어진 공공 활동
- Carter는 40년 넘게 전직 대통령으로 지냈고, 이는 역사상 가장 긴 기간임
- 퇴임 뒤에는 국내 공공봉사와 해외 민주주의·인권 지원에 삶을 바침
- Harry S. Truman 이후 가장 검소하게 산 전직 대통령으로도 알려짐
- Carter와 Rosalynn은 1961년 직접 지은 Plains의 목장형 주택에서 끝까지 살았음
- 기업 이사회 자리와 고액 강연을 거절함
- 2018년 인터뷰에서 White House에 있었던 일을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함
- 대신 전쟁부터 목공까지 다양한 주제로 책 33권을 썼고, 오디오북 녹음으로 Grammy Awards 3개를 받음
- 부부는 수십 년 동안 매년 1주일씩 Habitat for Humanity와 함께 집을 지음
- 14개국에서 약 4,300채의 주택 건설 또는 수리에 참여함
Carter Center와 국제 활동
- Carter 부부는 1982년 Atlanta의 Emory University에 Carter Center를 설립함
- Carter Center는 평화 중재와 인도주의 활동의 기반이 됨
- 교육, 농업 개발, 보건의료 프로그램을 후원하고 전 세계 공정 선거를 지원함
- Carter는 비공식 순회 대사처럼 선거 감시, 분쟁 중재,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 활동을 함
- 1994년 Bill Clinton 대통령 요청으로 Haiti의 군사정권 퇴진 합의 형성에 기여했고, 미국의 침공 가능성을 피하게 함
- 임무 수행 과정에서 North Korea의 Kim Il Sung, Libya의 Moammar Gaddafi 등 악명 높은 독재자들과도 만남
- Carter Center는 웹사이트 기준 40개국에서 115개 선거를 감시함
- 1994년 Balkans에서는 Serbian 지도자 Radovan Karadzic와 단파 라디오로 고성이 오간 대화를 포함한 협상을 벌였고, 그 결과 4개월 휴전이 이뤄짐
- Carter Center는 Africa의 일부 최빈국에서 수백만 명을 괴롭히던 Guinea worm disease를 사실상 근절하는 데 기여한 수십 년 규모의 활동도 조율함
논란과 Nobel Peace Prize
- Carter의 독자 외교는 때로 미국 정책에 대한 공개 비판을 포함했고, 반발을 부르기도 함
- 1994년 North Korea 핵시설에 대한 U.N. 사찰 문제에 개입하면서 Clinton을 화나게 함
- 2006년 저서 Palestine: Peace Not Apartheid는 Palestinian territories에 대한 Israel 점령을 South Africa의 과거 apartheid 체제와 같게 보이게 했다는 비판을 받음
- 보수 논객 Steven F. Hayward는 Carter의 퇴임 후 활동을 “대개 당혹스럽고 종종 재앙적인 평화 임무”라고 비판함
- 더 널리 퍼진 평가는 Carter의 평화와 인권 추구가 존경스럽고 전직 대통령의 새 기준을 세웠다는 쪽이었음
- Nobel 위원회는 2002년 Carter에게 Nobel Peace Prize를 수여하며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 경제·사회 발전 촉진을 위한 수십 년의 노력을 평가함
Plains 출신 정치인의 이미지
- Carter의 대통령 당선은 Watergate 이후의 정치 상황 속에서 가능해짐
- 1976년 Carter는 Gerald Ford를 근소하게 이겼지만, 실제 선거운동의 핵심 상대는 Nixon의 유산이었음
- Georgia의 땅콩 농부 이미지를 앞세우고, 비행기에서 직접 옷가방을 들고 내리며, Washington에 공개적이고 정직한 리더십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함
- 이는 현대 대통령 후보들이 Washington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벌이는 방식의 초기 사례 중 하나였음
- 1977년 취임식 날 Carter와 Rosalynn, 딸 Amy는 대통령 리무진에서 내려 Pennsylvania Avenue를 걸어 White House까지 이동함
- 그는 대통령직의 “제국적” 장식에 거리감을 보였고, 방에 들어설 때 Hail to the Chief 연주를 거부하기도 함
- 이런 방식은 Nixon 이후 많은 사람에게 신선했지만, 대통령직을 깎아내린다고 보는 이들에게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짐
‘malaise’ 연설과 정치적 취약성
- 1979년 미국인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Carter의 대응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것으로 받아들여짐
- 1979년 7월 Carter는 에너지 연설을 갑자기 취소하고 Camp David로 물러나 다양한 인사들과 집중 논의함
- 7월 15일 전국 TV 연설에서 미국 정신의 위기를 말했고, 이 연설은 Carter가 실제로 쓰지 않은 단어인 malaise speech로 불리게 됨
- 연설은 처음에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곧 Carter가 행정부 실패를 미국인 탓으로 돌린다는 공격에 쓰임
- 이틀 뒤 Carter는 전체 Cabinet의 사표를 요구하고 장관 5명을 해임함
- 이후 Iranian 학생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함
- 21세기 초에는 미국 사회의 분열이 정치적 마비로 이어진다는 Carter의 경고가 많은 이들에게 선견지명처럼 보였음
- 핵무기가 비우호적이고 불안정한 정권으로 확산되는 문제에 대한 그의 강조도 뒤늦게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짐
어린 시절과 미 해군 경력
- James Earl Carter Jr.는 1924년 10월 1일 Atlanta 남쪽 약 150마일의 농촌 마을 Plains에서 네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 가족은 Plains 서쪽 약 2마일의 Archery 농장에서 살았고, 집에는 전기와 수도가 없었음
- 아버지 Earl Carter는 농장과 땅콩 창고 등 사업을 확장한 인물이었음
- 어머니 Lillian Gordy Carter는 간호사 출신으로, 흑인과 백인이 모두 드나드는 사회적 공간으로 집을 만들고 소작농 가족에게 의료 처치와 조언을 제공함
- Carter는 엄격한 인종분리 시대의 남부에서 자랐지만, Archery에는 백인 가족이 한 집뿐이었고 어린 시절 친구 다수는 흑인이었음
- Plains High School을 1941년 졸업한 뒤 Georgia Southwestern College와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를 거쳐 1943년 U.S. Naval Academy에 입학함
- 전시 가속 일정에 따라 1946년 졸업했고, 800명 넘는 반에서 59등을 기록함
- 졸업 직후 Plains 출신 Eleanor Rosalynn Smith와 결혼함
- 해군에서 표면함 근무 뒤 잠수함 부대에 지원했고, Hyman G. Rickover가 이끄는 미국 최초 핵추진 잠수함 개발 프로그램에 들어감
- Carter는 훗날 Rickover가 자신의 아버지 다음으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말함
Georgia 복귀와 정치 입문
- 195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Carter는 해군을 떠나 Georgia로 돌아가 가족 사업을 맡음
- Rosalynn은 창고의 회계와 관리 업무를 맡았고, Carter는 현대 농업의 기술적·과학적 세부에 몰두하며 사업을 키움
- Carter는 Plains Baptist Church, Lions Club, 지역 학교·도서관 위원회, 카운티 계획위원회에서 활동함
- 1962년 Georgia 주상원 선거에 출마해 정치 경력을 시작함
-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근소하게 뒤졌지만, Quitman County에서 투표 부정과 ballot stuffing이 드러남
- Carter는 선거 결과에 도전해 승리했고, 1963년 1월 Georgia Senate에 입성함
- 주상원에서 4년을 지냈고,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평판을 얻음
- 모든 법안을 읽겠다고 약속했으며, 따라가기 어려워지자 속독 수업을 들음
Georgia 주지사와 인종 문제
- 1966년 Carter는 Georgia 주지사 민주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고 3위로 패함
- 이 패배 뒤 깊은 종교적 변화를 겪었고, 이후 자신의 삶을 이끈 “born-again” 경험으로 봄
- 1970년 다시 주지사에 도전하면서 보수적 농촌 유권자를 적극 공략하고 African American 커뮤니티와 거리를 둠
- 일부 Georgia의 대표적 인종분리주의자들이 Carter를 지지했지만, 이 선거는 옛 동맹 일부의 지지를 잃게 함
- Carter는 경선 결선에서 Carl Sanders를 이기고 본선에서도 쉽게 승리함
- 1971년 1월 12일 Georgia 주지사 취임 연설에서 “인종 차별의 시간은 끝났다”고 선언함
- 이 연설은 전국적 주목을 받았고, Carter를 인종 정치의 남부를 넘어서려는 젊은 New South 정치인 세대의 대표 인물로 만들었음
- 주지사로서 여성과 소수자를 이전 모든 주지사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주정부 직책에 임명함
- 공립학교 개선, 교도소와 사법제도 개혁도 추진함
1976년 대선 승리와 1980년 패배
- Georgia 주지사는 당시 헌법상 단임으로 제한됐지만, Carter는 대통령 출마를 준비함
- 1975년 10월까지도 1976년 민주당 대선주자 여론조사에 그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았음
- Hamilton Jordan과 Jody Powell은 Carter의 대선 준비와 대통령 재임기에 핵심 보좌진으로 활동함
- Carter는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의 중요한 선거직을 얻어 전국 민주당 정치인과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음
- 1976년 Iowa caucuses에서 전체 1위는 uncommitted delegates였지만, Carter는 출마자 중 1위를 차지해 언론 주목과 추진력을 얻음
- New Hampshire primary 승리와 경쟁자들의 잇따른 이탈 끝에 민주당 후보가 됨
- 1976년 Carter 캠페인은 Iowa를 White House로 가는 출발점으로 굳히는 데 기여함
- Carter는 Walter F. Mondale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고, 가을 선거 초반 공화당 후보보다 여론조사에서 30포인트 앞섬
- Ford의 추격과 Playboy 인터뷰 논란으로 격차가 줄었고, Carter는 2%포인트 차로 승리함
- 1980년 7월 여론조사에서 Carter 지지율은 21%로 나타났고, 이는 역대 대통령 중 매우 낮은 수치였음
- 민주당 경선에서는 Edward M. Kennedy의 도전을 받았고, 본선에서는 보수 운동의 영웅 Ronald Reagan과 맞섬
- Reagan은 TV 토론에서 “There you go again”이라는 말로 Carter의 공격을 무력화했고, 선거에서 약 10%포인트 차로 승리하며 50개 주 중 44개 주를 휩씀
October surprise 의혹과 퇴임
- Carter 주변 인사들은 Reagan 지지자들이 Iranian 당국자들과 접촉해 인질 석방을 1980년 대선 이후로 미루게 했다고 오랫동안 믿었음
- 이 의혹의 목적은 Carter가 선거 막판 인질 석방이라는 October surprise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짐
- 미국 House와 Senate 조사는 그런 음모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내림
- 2023년 3월 New York Times는 Texas 정치인 Ben Barnes의 주장을 보도함
- Barnes는 1980년 여름 John B. Connally Jr.와 함께 여러 Middle East 국가를 방문했고, Connally가 Reagan 취임 전까지 인질 석방을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Iranian 당국자에게 전달하도록 현지 지도자들에게 요청했다고 주장함
- Connally와 주요 인물 다수는 이미 사망했고, Barnes의 주장은 독립적으로 확인될 수 없었음
- Carter의 첫 전직 대통령 활동은 Reagan의 요청에 따라 Germany의 미군 기지로 날아가 Iran에서 돌아오는 미국 인질들을 맞이한 일이었음
- 퇴임 일주일 전 고별 연설에서 Carter는 대통령이라는 직함보다 민주주의에서 더 높은 유일한 직함인 “citizen”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함
댓글과 토론
Hacker News 의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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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y Carter의 명복을 빎. 노년을 의미 있게 사는 모습의 본보기였음
The Onion이 그의 나이를 소재로 한 농담을 많이 했는데, “98세 전 대통령 Jimmy Carter가 최근 받은 정관수술을 되돌렸다고 발표”, “Jimmy Carter와 Dianne Feinstein이 50년 뒤 둘 다 싱글이면 결혼하기로 약속”, “Jimmy Carter가 민주당의 신선한 얼굴 선호가 2020년 자신의 기회에 악영향을 줄까 우려” 같은 식이었음
그가 이런 글을 읽고 웃었기를 늘 바랐고, 실제로 그럴 법한 사람처럼 보였음
https://www.google.com/search?q=site%3Ahttps%3A%2F%2Ftheonio...- The Onion은 마지막을 “48살 토끼가 마침내 일을 끝냈다”로 장식했음. https://theonion.com/48-year-old-rabbit-finally-finishes-the...
- 그는 인류 전체를 섬기는 연민의 삶에 헌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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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lanta의 Jimmy Carter Center에서 일하는 지인들이 몇 명 있는데, 건강이 막을 때까지, 그리고 조금 지난 뒤에도 그는 매일 나와서 일했음
그의 견해나 방식에 동의하든 아니든, 90대까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으면 함
그만큼 이타적인 대통령은 없었다고 봄. 편히 쉬길,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음- Jimmy Carter의 Hamas에 대한 초기 지지를 다룬 글: https://philip.greenspun.com/blog/2024/12/29/jimmy-carter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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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뒤 이 태양열 난방기는 호기심거리, 박물관 전시품, 가지 않은 길의 예시가 될 수도 있고, 미국인이 시작한 가장 위대하고 흥미로운 모험의 작은 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Carter가 말했음. Reagan은 1986년에 그 패널들을 철거했음
이것만 봐도 Carter와 Reagan의 유산이 각각 무엇인지 알 수 있음- Carter가 설치한 32개 패널은 태양열 온수 패널이었다는 점이 중요함
즉 거기에 혁신 기술은 없었고, 오늘날의 태양광 발전 패널보다 공간 효율이 훨씬 떨어지고 활용성도 낮은 기술 경로였음
현대 태양광 발전은 대체로 Martin Green으로 이어지는데, 그는 호주에 있었기 때문에 호주·일본·중국 연구자들과 주로 작업했음. 미국 과학자 프로젝트에 자금을 더 댔다고 해서 최선의 결과가 나왔을지도 불분명함
그래서 Carter의 태양광 초점은 상징적으로는 훌륭했지만, 더 강한 미국 보조금은 미국을 독일처럼 보이게 했을 수도 있음. 비싸고 비효율적인 태양광 발전이 점점 부담이 되는 모습 말임. 그래도 계속 더 효율적인 장비를 설치해 온 독일과 전력 소비자들은 인정할 만함 - 1970년대의 갤런당 5달러 휘발유, 22% 주택담보대출 금리, 그리고 Reagan이 그것을 고치겠다며 당선된 배경도 잊으면 안 됨
- 어떤 패널을 말하는 건지,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함
- “패널 3개는 박물관 소장품이 되었다. 하나는 2009년 Unity College가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에 기증했다. 또 하나는 Jimmy Carter Presidential Center에 전시되어 있다. 세 번째 패널은 2013년부터 중국 더저우의 Solar Science and Technology Museum에 있다.” [1]
Carter가 제시한 선택지 중 미국은 박물관 전시품을 고른 셈으로 들림
[1] https://en.m.wikipedia.org/wiki/Solar_power_at_the_White_Hou...
- Carter가 설치한 32개 패널은 태양열 온수 패널이었다는 점이 중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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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Carter 일화는 낚싯배에 있었을 때 swamp rabbit이 공격적으로 배에 다가왔고, Carter가 노로 쫓아냈다는 이야기임
참모들에게 말했지만 믿지 않았는데, 당시 White House 사진사가 여행 사진을 찍고 있어서 토끼가 사진에 잡혔음. 물론 언론은 이를 과장해 Carter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데 썼음
https://en.wikipedia.org/wiki/Jimmy_Carter_rabbit_incident
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을 본 사람들에게는, 그 영화의 ‘killer rabbit’이 Carter의 낚싯배를 공격한 바로 그 토끼였다고 장난삼아 믿고 있음
https://www.youtube.com/watch?v=XcxKIJTb3Hg
편히 쉬길, Jimmy- The Onion의 사망 발표도 “48-Year-Old Rabbit Finally Finishes the Job”였음
https://theonion.com/48-year-old-rabbit-finally-finishes-the... - 이 이야기를 못 들어서 “swamp rabbit”이 악어를 가리키는 속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음. 진짜 토끼였음
- 엄밀히 말하면 찾는 표현은 “recreationally believed”보다 headcanon에 가까움. “그 영화의 ‘killer rabbit’이 Carter의 낚싯배를 공격한 그 토끼라는 게 내 headcanon이다” 같은 식임
앞으로 Holy Grail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게 될 듯함
RIP Jimmy - https://xkcd.com/204/
- The Onion의 사망 발표도 “48-Year-Old Rabbit Finally Finishes the Job”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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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ter는 재선에 불리한 단기 희생을 감수해 1980년대 경제 호황의 무대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음
그의 행정부가 항공·트럭 산업에서 시장 지향적 규제 완화를 했고, 주 경계를 넘어 물건을 운송하는 데 면허와 독점 트럭 회사를 거칠 필요가 없게 만들었음. 또한 Paul Volcker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해 당시의 스태그플레이션을 끝내라는 임무를 줬고, 이는 금리를 크게 올려 경제를 일시적으로 둔화시키는 일이었음
아마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큰 일화지만, Carter가 Volcker에게 “인플레이션을 끝낼 수 있나”라고 묻자 Volcker가 “가능하지만 아마 재선은 날아갈 겁니다”라고 답했고, Carter가 “그럼 하라”고 했다는 말이 있음. Reagan은 그 조건 속에서 집권했음
Reagan 시기의 “시장 개혁” 대부분은 친시장이라기보다 친기업적이었고, 저축대부조합 위기 같은 큰 문제를 낳았음
Carter는 인터뷰와 기자회견에서 너무 깊이 생각하는 듯 보여 대중에게 결단력 있게 보이지 않았던, 영감을 주는 타입의 인물은 아니었음. 그래도 그 모습은 그가 어떻게 사고하는지 보여줬음
어쨌든 그는 타이밍의 희생자에 가까웠고, 나라에 최선인 일을 한 저평가된 대통령이었음- 이런 이유로 Jimmy Carter는 20세기 대통령 중 내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대통령임. 1위는 Calvin Coolidge, 2위는 Dwight Eisenhower임
Paul Volcker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Carter가 그를 연준 의장으로 지명해 다행이라고 봄. Reagan이 2기에도 Volcker를 계속 의장으로 뒀다면 좋았을 것임 - Reagan의 첫 번째 행정명령은 석유와 가스의 배분·가격 통제를 모두 폐지하는 것이었음
만성적인 주유 대기줄은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음
그날을 잘 기억함 - 인플레이션은 명백히 유가 충격 때문에 발생했음. 석유 가격이 세 배가 됐고, 서구의 석유 기반 경제에는 완전한 재앙이었음
금리 인상이 그것을 해결했다는 식의 해석은 역사를 기묘하게 재창조한 것에 가까움. 영국에서도 같은 핑계가 쓰였고, 지금도 임금 상승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만 자원 가격 충격, 자산 가격 인플레이션, 기업 폭리는 마법처럼 그렇지 않다는 전설이 남아 있음
Carter는 드물게 품위 있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진심으로 옳은 일을 하려 평생을 보냈음. 다만 지정학의 냉혹한 사이코패스적 현실에는 조금 버거웠을지도 모름 - Reagan의 첫 2년 반도 매우 높은 금리와 고통스러운 경기침체로 인플레이션을 잡으며 80~90년대 성장의 무대를 놓았음
그 도박이 통하지 않았다면 Reagan은 크게 졌겠지만, 1984년에는 강한 성장이 시작돼 압승했음 - 단기 이익에 집착하고 장기 계획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통령을 막 뽑았다는 게 정말 걱정됨
Biden은 Carter처럼 단임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 부분은 망치지 않았음. 정치적으로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지더라도, 어른들이 통제하는 게 좋음
- 이런 이유로 Jimmy Carter는 20세기 대통령 중 내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대통령임. 1위는 Calvin Coolidge, 2위는 Dwight Eisenhower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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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로 선한 사람처럼 보였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원자로 용융 사고 해결을 도왔다는 것임
https://www.military.com/history/how-jimmy-carter-saved-cana...- “정말로 선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부분이야말로 전 세계 정치가 잘못된 지점이라고 봄
10~20년 전만 해도 어떤 나라의 지도자나 시장 같은 선출직 지도자가 내 여동생과 데이트하거나 내 아이들을 봐준다고 해도 진심으로 괜찮았을 것 같음
요즘은 가장 자기애적인 나쁜 사람들이 당선되는 느낌임.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개도 맡기지 못하겠고, 거의 모든 나라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음
Jacinda Ardern은 큰 예외이고, 분명 다른 예외도 있을 것임 - SNL은 그를 많이 놀렸지만, Ask President Carter 코너는 완벽했음
https://www.youtube.com/watch?v=-68iTvhWNB0
Rodney Dangerfield가 SNL “The Pepsi Syndrome” 스케치에서 표현한 것처럼, Jimmy Carter는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Amazing Colossal President로 남을 것임
https://www.facebook.com/watch/?v=533858710873763
https://snltranscripts.jt.org/78/78ppepsi.phtml
그리고 불쌍한 Billy는 늘 판지 상자만 받았음
https://snltranscripts.jt.org/78/78ncarter.phtml
- “정말로 선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부분이야말로 전 세계 정치가 잘못된 지점이라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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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ter는 20세기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친팔레스타인 성향이 강했음. 그의 책 Palestine: Peace Not Apartheid는 읽어볼 만함
https://en.wikipedia.org/wiki/Palestine:_Peace_Not_Apartheid- 나는 그가 친평화였다고 봄
그는 Israel과 Palestine 둘 다 존재하길 원했지, 한쪽이 다른 쪽을 희생시키는 구도를 원한 게 아니었음. Egypt와의 평화조약도 친Egypt라기보다 친평화였던 것과 같음
그래서 그는 West Bank의 Israel 정착촌에 반대했고, 그것이 apartheid와 유사한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말했음. 예: https://www.amnesty.org/en/latest/campaigns/2022/02/israels-...
제안으로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음. Israel이 West Bank와 Gaza 상당 부분을 병합하면서도 Palestinians에게는 자체 국가도, Israel 시민권도 주지 않는 방향으로 갈 것처럼 보이기 때문임 - 그는 Israel과 중동 국가인 Egypt 사이의 진지한 중동 평화협정, 즉 Camp David Accord를 중재한 첫 미국 대통령이었음
- 2006년에 “Free Palestine”을 촉구하는 책을 통째로 썼다는 뜻인가? 몰랐음
- 나는 그가 친평화였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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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고 이상주의적인 민주당원들에게 전통적 의미의 진보적 포퓰리스트가 어떤 것인지 설명할 때 Carter의 유산을 자주 활용함
Obama가 당선되기 위해 Wall Street 거물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고, “hope”와 “change” 같은 평범한 연설로 그들에게서 얼마나 더 챙겼는지, Jimmy Carter와 비교해 찾아보라고 함
대학생이나 20대의 젊은 민주당원 대부분은 Obama를 우상화하지만, 그는 은행을 1달러당 100%로 구제했고, Libya·Syria·Yemen 전쟁을 시작했으며, Afghanistan·Iraq 전쟁을 확대했고, 무보험자를 위한 단일지불자 의료보험에 반대했음. 또 불법·초법적 임시 외국인을 너무 많이 들여보내 이제 누구도 합법 이민을 기다릴 유인이 없어졌음
Obama에게 Nobel Peace Prize를 준 것은 Carter 대통령의 유산에 대한 모욕이었고, 1973년 Henry Kissinger와 함께 평화상을 받기를 거부한 베트남 지도자 Le Duc Tho의 말을 떠올리게 함. “안타깝게도 Nobel Peace Prize Committee는 침략자와 침략의 피해자를 같은 선상에 놓았다. … 그것은 실수였다”- “무보험자를 위한 단일지불자 의료보험에 반대했다”는 부분은 의문임
모두를 위한 단일지불자 의료보험이 Obama의 주요 선거 공약 중 하나 아니었나?
의회 통과에 필요한 표가 없어서 결국 ACA가 됐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것을 추진하긴 했음
- “무보험자를 위한 단일지불자 의료보험에 반대했다”는 부분은 의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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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ter Center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끔찍한 질병인 Guinea worm disease를 거의 박멸하기 직전임
다른 전직 대통령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데 쓸 수 있으면 좋겠음
https://en.m.wikipedia.org/wiki/Dracunculiasis
https://www.cartercenter.org/health/guinea_worm/index.html -
돌아보면 그는 1980년대 사람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대통령이었다고 봄
1980년에 재선됐더라면 미국은 훨씬 나은 위치에 있었을 것임. 한 가지 예로, 기후변화에 대한 실질적 작업이 1981년에 시작됐을 수도 있음. 지금처럼 앞으로 약 70년 뒤 평균 기온이 3°C를 넘어서는 걸 지켜보는 상황과 달랐을 것임
1980년 패배는 여전히 Kennedy 탓이라고 봄
편히 쉬길. 그는 평생 보통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일을 했고, 현재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음- Kennedy를 탓하는 해석은 처음 들어봄. 나는 Reagan 측 인사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봐왔음. 그들이 선거 이후까지 미국 인질을 붙잡아 두도록 외국 권력과 공모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임
“A Four-Decade Secret: One Man’s Story of Sabotaging Carter’s Re-election”
“A prominent Texas politician said he unwittingly took part in a 1980 tour of the Middle East with a clandestine agenda.”
https://www.nytimes.com/2023/03/18/us/politics/jimmy-carter-... - “기후변화에 대한 실질적 작업이 1981년에 시작됐을 수도 있다”는 건 흔한 신화임
1970년대 에너지 정책은 환경 우려가 아니라 석유 위기의 결과였음
때로는 효율 향상처럼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결과가 있었고, 때로는 합성석유나 셰일오일 같은 더 오염이 큰 대안에 대한 미국 정부 연구처럼 덜 그랬음. 때로는 Carter의 핵폐기물 재처리 금지처럼 해당 산업 전체를 뒤처지게 만든 어리석은 결정도 있었음 - 당시 Knoxville/Oak Ridge, Tennessee 지역에 살았음. Carter 시절 TVA는 태양열, 지열, 수동 냉방 주택의 실제 작동형 시범 주택을 만들었음
1980년 선거 직후 모두 취소됐음 - 그는 Kennedy가 전당대회를 빼앗으려 했고, Jon Anderson은 무소속으로 출마했음. 하지만 재선을 가라앉힌 것은 인질 사태였음
Cicero를 빌려 말하면, 그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만 아니었다면 모두가 Carter를 “훌륭한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고 했을 것임
편히 쉬길, Mr Carter -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Reagan보다 더 많은 규제 완화를 했는데도 우리는 그렇게 기억하지 않음
선거 패배의 경우, Carter는 애초에 정치적 책략에 관심이 없었음. 좋은 승산이 생길 리가 없었음
- Kennedy를 탓하는 해석은 처음 들어봄. 나는 Reagan 측 인사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봐왔음. 그들이 선거 이후까지 미국 인질을 붙잡아 두도록 외국 권력과 공모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