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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시대의 최대 수혜자를 자처하는 개발자가, AI와만 일한 지 1년이 넘은 시점에 느낀 위화감을 소설 《삼체》의 '지자(智子)' 비유로 풀어낸 에세이
  • 핵심 주장: AI는 일자리를 가져가기 한참 전에, 몰입·소유감·성장의 사다리 같은 "일자리보다 먼저 없어지는 것들"을 조용히 먼저 가져간다
  • AI 찬반 어느 쪽도 아니며, "무한한 편의가 우리를 천천히 멈춰 세우는 것 아닌가"라는 사고실험

0. 프롤로그 — '지자'라는 은유

  • 《삼체》에서 삼체인은 예원제가 보낸 지구 좌표를 받고 함대를 띄운다. 도착까지는 약 450년이 걸린다.
  • 그보다 먼저 온 것이 '지자'다. 양성자 크기로 접힌 초지능 컴퓨터인 지자는 ① 인류의 대화·문서·실험을 감시하고 ② 입자가속기를 교란해 기초과학을 봉쇄한다.
  • 지자 이후 인류는 도시와 앱, 컴퓨터는 발전시키지만 가장 밑바닥의 과학은 멈춘다. "적이 죽이러 오기 전에, 먼저 더 똑똑해지는 길을 막는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 이 지자를 우리가 사랑하는 AI, 특히 대형 LLM에 빗댄다.
    • 단, 설정상 동치는 아니다. 현대 AI는 과학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유사점은 "AI가 인류에게서 무언가를 먼저 빼앗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 AI에 대한 무조건적 찬반을 경계한다.
    • 모네 〈수련〉을 AI 그림이라고 속이자 사람들이 비판했지만 실은 진짜 모네였고, 반대로 보리스 엘다그젠은 AI 사진 수상을 거부했다.
    • 심리학 연구도 'AI' 라벨만 붙으면 같은 그림을 더 낮게 평가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런 편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1. 나는 AI를 열렬히 지지한다

  • 나는 AI 시대의 최대 수혜자라고 먼저 밝힌다.
    • 2025년 4월 퇴사의 큰 이유 중 하나가 AI였고, Cursor → Claude Code → Codex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 백엔드 커리어였지만 지금은 혼자 iOS 앱을 출시하고 데이터 분석·디자인·마케팅까지 한다. "혼자 무언가 벌이기에 이만한 시대가 없다."
    • 다만 블로그 글은 AI로 퇴고·리뷰·자료조사만 받고 직접 쓴다.
    • 조직에서 AI 효과가 작게 보이는 건 기술보다 조직과 일하는 방식의 문제라는 기존 입장도 유지한다.
  • 그런데 1년 넘게 AI와만 일한 지금,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는 신호를 느낀다. 즐기면서도 건강하고 싶은 상태다.
  • 이 신호 앞에서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 AI 프론티어 그룹: "이제 코더가 아니라 오케스트레이터, 중요한 건 Taste"라며 불안을 무시한다.
    • 절망주의자: "이제 개발자는 필요 없다"며 무너진다.
    • 인간 가치 우선 그룹: 글 쓰고 책 읽고, 필요하면 AI를 제한해서라도 실력을 키우자고 말한다.
  • 세 번째 그룹은 '꼰대' 소리를 들을까 침묵한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①의 확신과 ②의 절망만 크게 보인다.
  • 주니어가 "AI만 쓰니 실력이 안 쌓여요"라고 말하면 프론티어들은 "AI한테 물어봐라"고 답한다. 이 공감 능력의 부족을 지적한다.
  • 핵심 질문: "AI를 통해 일하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정말로 삶이 더 나아졌는가."

2. 가짜노동을 없애주는 기계

  •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을 세 가지로 나눈다.
    • 노동(labor): 생명 유지를 위한 반복. 이메일 정리, 자료 요약, 반복 코딩, 회계 같은 일이다. AI가 가장 먼저 없애주겠다고 말하는 영역이다.
    • 작업(work): 지속되는 것을 짓는 제작. 글쓰기, 프로그래밍, 디자인, 연구가 여기에 속한다. 바이브 코딩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인간 고유라 믿은 작업까지 대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행위(action): 타인 앞에서 새로 시작하는 말, 약속, 사과, 설득이다. 아렌트에게 인간이 인간인 가장 깊은 이유다.
  • 행위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사과문, 연설문, 자소서, 연애편지처럼 인간이 가장 미루는 행위에 AI가 많이 동원된다. "대신 시킨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다"라고 본다.
  • AI가 노동이라도 깨끗이 없애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 《가짜 노동》과 '불쉿잡'이 말하듯, 사람들은 의미 없는 일로도 바빠 보이려 한다.
    • 예전에는 무의미한 보고서도 사람의 시간과 고통이 제동장치였지만, 이제 회의록·보고서·OKR·전략초안은 거의 공짜로 생산된다. 문서 비용이 0이 되면 문서 요구는 오히려 늘어난다.
  • AI가 만든 슬라이드와 대시보드는 너무 그럴듯해서 가짜 노동이 더 이상 허술해 보이지 않는다.
  •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진짜 노동'이다. 반복 속에서도 리듬, 몸의 감각, 미세한 판단이 생긴다.
    • 나쁜 마찰은 없애도 된다. 불필요한 결재, 느린 도구, 중복 보고 같은 것들이다.
    • 하지만 좋은 마찰은 없애면 안 된다. 문제를 이해하려 머무는 시간, 손으로 하는 시행착오, 재료가 의도를 거스르는 순간이 여기에 속한다.
    • 대부분의 AI 제품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frictionless'를 판다.
  • 15년간 손 스케치로 비즈니스 모델과 아키텍처를 그려왔다. AI가 이를 말끔한 다이어그램으로 바꿔주면서 스케치 시간이 줄었지만, 손으로 그린 아이디어와 달리 AI 기획안은 일주일 뒤 세부가 남지 않았다.
  • MIT 미디어랩의 '인지 부채(cognitive debt)' 연구도 LLM을 쓴 그룹이 자기 문장을 제대로 인용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결과물의 질은 좋아도 '내 것'으로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 일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면 결국 번거로운 스케치를 내려놓게 된다. 예전보다 열 배 많은 결과물을 만들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닌 상태가 된다.

3. 노동이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가

  • "노동 해방은 인류의 오랜 꿈"이라는 반론에 되묻는다. 사라지는 것이 정말 노동뿐인가.
  • 오키나와의 장수 문화에는 '은퇴'보다 '이키가이', 즉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과성에는 비판이 많지만, 스스로 그만두고도 의미로 하루를 채우는 사람은 괜찮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다.
    • 핵심 변수는 노동 자체가 아니라 목적이다.
  • 심리학자 마리 야호다는 일이 돈만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일은 ① 시간 구조 ② 사회적 접촉 ③ 목적 ④ 정체성 ⑤ 활동을 준다. 임금은 그 바깥의 가장 잘 보이는 하나일 뿐이다.
  •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노동은 매일 다시 시작할 무대를 배달해주던 시스템이다. 노동을 들어내면 잃는 것은 월급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자리다.
  • 100억 사고실험을 꺼낸다. 원하던 모든 것이 충족되면 사람은 결국 그 상태에 적응한다. 복권 연구도 큰 당첨이 행복을 영구히 보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 다만 이후 대규모 연구는 돈이 행복을 계속 올린다는 결과도 냈다.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돈이 못 채우는 칸이 따로 있다.
  • 100억은 야호다의 여섯 칸 중 '돈' 하나를 채울 뿐이다. 시간, 연결, 쓸모, 정체성, 활동은 바로 살 수 없다. 노동 완전 해방은 그 다섯 칸을 담던 그릇을 비울 수도 있다.
  • "벗어나고 싶은 건 무의미한 노동이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로 빼앗기면 안 되는 건 월요일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날 이유다."
  • 현실에서는 아직 AI가 노동을 100% 가져가지도 못했고, AI가 못하는 번거로운 노동은 늘었으며 취업 시장은 나쁘다. 이 과도기 뒤에 진짜 노동의 자유가 올지는 아직 모른다.

4. 몰입하지 않는 인간은 불행해진다

  • "아침에 일어날 이유"의 답은 몰입(Flow) 이다.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활동에 깊이 빠져 시간 감각이 바뀌는 최적 경험으로 설명했다. 적절히 어렵고 피드백과 목표가 분명할 때 몰입이 생긴다.
  • 영화 〈F1〉의 소니 헤이스는 우승보다 'flying', 즉 살아있다는 감각을 위해 레이싱을 한다. 이를 몰입의 은유로 본다.
  • 개발자로서 설계 스케치에서 코드 구현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주 몰입했다. 그러나 CTO와 관리자로 일하며 그 순간을 잃었고, 혼자 만들기 위해 퇴사한 이유도 몰입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 아이러니하게도 코더로 돌아왔을 때 이미 코딩은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Claude Code 이후 직접 코드를 붙잡는 일은 생산성을 역행하는 선택이 되었고, 다시 관리자 일로 돌아간 셈이 되었다.
  • AI 에이전트를 잘 시키는 역량은 있었지만, 성과를 내야 하는 일에서 중간 과정의 몰입과 즐거움은 사라졌다.
  • 코드를 직접 쓰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AI 없이 혼자 풀스택 제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고, 성과가 과정의 즐거움보다 중요할 때도 많다. 다만 몰입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코딩만의 문제가 아니다. AI는 답을 너무 빨리 준다. 공허하게 받아낸 정답은 문제를 이해하기 전에 도착하기 때문에 내 것이 되지 못한다.
  • 예전에는 청소, 집안일, 잡일을 돈으로 샀지만 지금은 청소, 빨래, 설거지, 걷기, 세무 신고에서도 몰입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돈은 결국 온전히 몰입하며 쓸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비용이었다.
  • 결론: AI가 일자리를 가져가기 한참 전에 이미 조용히 가져가는 것은 '몰입할 기회'다. 되찾는 법은 아직 모르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지금 오랜만에 조금 몰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5. 성장 기회 박탈 (개인 → 세대·구조 문제로 전환)

  • 문제는 개인의 몰입 상실을 넘어 세대와 구조로 확장된다.
  • 주니어가 "AI만 쓰니 실력이 안 쌓여요"라고 묻는데 "AI한테 물어봐라"라고 답하는 것은 답답하다. 무엇을 질문할지 아는 것 자체가 실력이기 때문이다.
  • 주니어 시절을 떠올린다.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고, 복붙한 코드의 로직도 몰랐다. 서버가 떨어지고 나서야 SQL 쿼리의 문제를 알았고,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아키텍처를 공부했다.
  • 성장은 대부분 삽질에서 왔다. 반나절짜리 버그, 남의 코드 읽기, 아무도 안 읽을 문서, 며칠짜리 화면 구현 같은 것들이다. 회사에는 비효율이었지만, 감각은 거기서 생겼다.
  • 문제는 AI가 가장 먼저 치우는 것이 그 낮은 계단이라는 점이다. 작은 버그, 테스트 코드, 보일러플레이트, 단순 기능은 주니어가 배울 자리였지만 이제 Claude가 더 싸고 빠르다.
  • 누구도 악의가 없다. 나 자신도 매일 그런 합리적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쌓이면 다음 세대 시니어가 만들어질 자리가 사라진다.
  • 스탠퍼드 연구진의 미국 급여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AI에 많이 노출된 직군에서 커리어 초기 고용이 꺾였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정점 대비 거의 20% 감소했다. 반면 경력자는 멀쩡하거나 오히려 늘었다.
    • 단, AI 탓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금리와 경기 영향도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같은 신호가 없다는 반박도 있다. 제목이 과할 수 있음도 인정한다.
  • 그래도 메커니즘은 선명하다. AI가 잘 베끼는 것은 문서와 책으로 배운 지식이고, 그것이 주니어가 시장에 들고 나올 수 있는 거의 전부다. 그래서 대체는 하필 '입구'에서 먼저 일어난다.
  • 자기 모순도 고백한다. 한때 풀스택 지원자를 깊이가 없다고 보던 내가 지금은 AI로 혼자 풀스택을 한다. 그래서 주니어에게 삽질을 권할 염치도 줄었다.
  • 예전 멘토링은 정답을 알려주고 싶은 입을 참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참아도 옆에서 Claude가 답을 준다. 헤맬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 마무리 질문은 이것이다. 모두가 오너십을 가져야 하지만 모두가 오너가 될 수는 없다. "주니어 시절의 내가 지금 시대를 마주했다면 나는 과연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러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6. 에필로그 — 면벽자, 그리고 남은 질문

  • 문제는 주니어만의 것이 아니다. 검색 시대에는 헤매며 지도가 머리에 남았지만, AI는 그 헤맴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답은 더 정확해졌지만 나는 헤매본 적이 없다. "매끄러움이 망설임을 지운다."
  • "내일 아침 세상의 GPU가 전부 멈춘다면"이라는 사고실험을 던진다. 그다음 날 학생, 직장인,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장 내 코드부터 AI 없이 읽어낼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 자동화로 인한 탈숙련의 선례도 있다.
    • 항공업계는 자동조종 덕분에 더 안전해졌지만, 수동 비행 감각을 위해 손으로 모는 훈련을 유지한다.
    • 런던 택시 기사들은 길을 외우는 시험으로 공간 기억이 단련된다. 반대로 GPS 의존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 수 있다.
  • 우리가 쓰는 GPU조차 내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레이터'라는 직함도 빅테크 데이터센터가 있어야 성립한다.
  • "진짜 공포는 AI가 너무 강해지는 게 아니라, AI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너무 약해져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 《삼체》에서 인류의 마지막 무기는 '면벽자'다. 지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의 머릿속만은 볼 수 없다. 그래서 인류는 계획을 머릿속에서만 굴릴 사람들을 세운다.
  • AI 시대의 면벽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AI를 안 쓰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들어오지 못하는 생각의 방을 하나쯤 남겨둔 사람.
  • 내가 세운 난간은 세 가지다.
    • 하나. 생각의 첫 스케치는 손으로 한다.
    • 둘. 일주일에 하나는 아무리 작아도 AI 없이 끝까지 만든다.
    • 셋. 읽고 또 읽는다.
    • 이 난간을 세우는 과정은 AI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적과의 동침이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 첫 질문, "이미 지자가 온 건 아닐까"에 대한 답은 그렇다. 지자는 이미 도착해 있다. 다만 우리의 지자는 적의가 아니라 편의를 들고 왔다. 아무것도 막지 않고 다 해주며, 그 편의로 더 깊이 알아내는 길과 살아갈 이유를 하나씩 없앤다.
  • 마무리: 지자(AI)는 끝내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총성도 침공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몰입하던 자리, 월요일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하나씩 뺏어갈 뿐이다.
  • 답 대신 질문으로 닫는다.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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