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 by GN⁺ 18시간전 | ★ favorite | 댓글 1개
  • 의식은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예외가 아니라, 뇌우나 단백질 접힘처럼 매우 복잡한 자연 현상으로 이해 가능함
  • Chalmers의 어려운 문제는 뇌 과정과 경험 사이의 설명 간극을 전제하지만, 그 간극은 이원론을 먼저 들여올 때 생김
  • 1인칭 경험과 3인칭 과학 설명의 차이는 같은 뇌 현상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외부에 나타나는 관점 차이
  • 철학적 좀비 논증은 비물리적 의식의 존재를 처음부터 받아들여야 인간과 좀비를 구별할 수 있어 설득력이 약함
  • 더 중요한 과제는 초월적 영혼을 가정하지 않고 뇌와 몸의 작동을 이해하며, 정신생활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임

의식 논쟁의 출발점

  • 의식은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영혼”도 신체와 세계의 다른 현상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
  • 인간은 자기 이미지가 흔들리는 지식에 저항해 왔고, Darwin의 공통 조상 개념이 격렬한 저항을 받은 것처럼 의식 논쟁도 인간이 비활성 물질과 같은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함
  • 중세 서구 문명은 인간을 몸과 영혼이라는 두 실체로 나눴고, 영혼은 기억·감정·주관성·자유·책임·덕·가치의 저장소이자 신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초월적 존재로 여겨졌음
  •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지만, 의식이 어려운 이유는 자연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뇌우나 단백질 접힘처럼 매우 복잡한 자연 현상이기 때문임
  • 어떤 현상의 이해가 갱신된다고 해서 그 현상이 부정되지는 않음
    • 고대와 중세에는 일몰을 태양이 지구 위를 움직이며 내려가는 현상으로 이해했지만, 오늘날에는 지구 자전으로 태양이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으로 이해함
    • 이 변화가 일몰을 환상으로 만들지 않듯, 뇌의 작동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해서 영혼이 환상이나 비현실이 되지는 않음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대한 반박

  • 의식 논쟁은 David Chalmers가 1994년 Tucson에서 한 영향력 있는 강연의 용어로 자주 구성됨
  • Chalmers는 의식의 두 문제를 구분했음
    • 뇌 과정이 관찰 가능한 행동과 보고 가능한 내적 행동을 어떻게 낳는지 이해하는 문제를 의식의 “쉬운 문제”라고 불렀음
    • 왜 뇌의 행동에 경험이 동반되는가라는 문제를 “어려운 문제”라고 불렀음
  • Chalmers는 인간의 전체 행동과 내면생활에 대한 모든 보고를 설명하더라도, 뇌 과정과 경험 사이에는 여전히 설명 간극이 남는다고 봄
  • 이 간극은 경험의 가상적 기본 단위인 “qualia”, 어떤 실체가 경험을 가질 수 있다는 “주관성”, Thomas Nagel의 표현처럼 어떤 경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라는 문제로 반복됨
  • 현재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이해하게 될지 지금 알 수 있다는 전제는 성립하기 어려움
  • “어려운 문제”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경에는 Baruch Spinoza가 수세기 전 예견한 생각, 즉 영혼도 자연의 다른 현상과 같은 기본 성질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강한 저항이 있음
  • 르네상스 시대에는 하늘과 지구가 같은 성질이라는 점을, Darwin 이후에는 동물과 인간이 친족이라는 점을, 최근 생물학 발전 이후에는 생명체와 비활성 물질이 같은 성질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음
  • 의식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정신과 자연, 주체와 객체가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세계관을 유지하게 만듦

세계 바깥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보기

  • Chalmers는 경험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보지만, 과학적 이해는 경험 바깥에 있지 않고 경험 자체를 다룸
  • 경험론은 과학의 대안이 아니라 과학의 전통적 개념 토대에 속함
  • Alexander Bogdanov의 표현처럼, 과학은 경험을 성공적으로 집단 조직해 온 역사적 과정임
  • 과학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를 바깥에서 관찰하고 기술하는 직접 설명으로 보면 처음부터 이원론이 들어오며, 지식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환원 불가능한 간극이 생김
  • 지식과 이해의 주체인 인간은 세계 바깥에 있지 않고 세계의 일부임
  • 이론과 지식은 바깥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탈신체적 관점이 아니라, 실제 세계를 항해하도록 돕는 신체화된 도구
  • 이해, 감정, 지각, 경험은 모두 자연 현상임
  • 의식에 대한 혼란은 지식·의식·qualia를 과학적 그림에서 따로 도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할 때 생김
  • 실제로 과학적 그림은 바로 지식·의식·qualia에 관한 이야기이며, 경험은 뇌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추가로 얹힌 것이 아님
  • 1인칭 경험 기술과 3인칭 과학적 설명 사이의 이원론은 같은 뇌 현상이 그 뇌 자신에게 경험되는 방식과 다른 대상에게 경험되는 방식의 관점 차이로 이해될 수 있음
  • “주관적 경험”, “qualia”, “의식”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에 붙인 이름임
    • 몸과 뇌 안에서 일어나는 방식은 외부에서 상호작용하는 대상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다름
    • 이것은 신비한 설명 간극 때문이 아님
  • “빨강”이라는 qualia는 빨간색을 보거나 기억하거나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겪는 과정의 이름임
    • “고양이”라고 부르는 동물이 왜 고양이처럼 보이는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듯, “빨강”이 왜 빨갛게 보이는지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음
  • 1인칭 관점은 객관적 3인칭 관점에서 도출해야 하는 것이 아님
  • 모든 설명은 관점적이며, 지식은 언제나 신체화되어 있음
  • 세계는 실재하지만, 그 세계에 대한 어떤 설명도 세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
  • 주관성은 신비한 것이 아니라 관점의 특수한 사례임
  • “형이상학적 간극”과 “설명 간극”은 과학적 그림을 궁극적 현실의 직접 설명으로 오해할 때 생김

‘철학적 좀비’ 논증의 약점

  • Chalmers의 “철학적 좀비”는 인간과 모든 면에서 똑같이 보이고 행동하며, 감정·느낌·꿈·경험을 보고하지만 의식은 없는 가상적 존재임
  • Chalmers의 표현대로라면 그 안에는 “아무도 집에 없음”
  • 이 사고실험은 행동과, 오직 내성으로만 접근 가능한 가상적 현실을 구분하도록 유도하는 수사적 장치임
  • Chalmers는 철학적 좀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적 경험이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봄
  • 그러나 철학적 좀비는 주관적 경험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해야 함
    • 그렇지 않다면 인간과 경험적으로 구별될 수 있음
  • Chalmers의 핵심은 그가 말하는 가상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의식의 존재를 오직 내성으로만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음
  • 내성 중에는 뇌의 물리적 과정이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고 확신시킴
  • 같은 일이 이론상 좀비의 뇌에서도 일어나며, 그 좀비 역시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고 확신하게 됨
  • 좀비가 실제로 그런 비물리적 경험이 없는데도 같은 확신을 갖게 된다면, 자신이 신비한 비물리적 경험을 갖는다는 결론을 믿을 근거가 약해짐
  • 물리적으로 동일한 좀비 쌍둥이는 경험까지 포함해 정확히 같아야 함
  • 철학적 좀비는 Chalmers가 증명하려는 것, 즉 세계에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를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보통 인간과 구별됨
  • 철학적 좀비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하며, 설득력 낮은 형이상학적 가능성과 초월적 영혼 개념에 대한 향수를 드러냄

영혼은 실재하지만 자연의 일부임

  • “의식”과 “경험”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며 우리를 이루는 사건을 가리키는 이름임
  • 그런 사건이 충분한 능력을 가진 외부 관찰자에게 다른 이름으로 동등하게 기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반박하는 논증은 없음
  • 현재 완전한 외부 설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런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증거가 아님
  • 잘못된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마음과 몸 사이에 형이상학적 간극이 존재한다고 처음부터 가정함
  • 이 가정은 지난 수세기 동안 자연에 대해 배운 모든 것과 충돌함
  • 마음은 높은 수준의 언어로 적절히 기술된 뇌의 행동임
  •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경험과 외부에서 보는 나에 대한 경험 중 어느 하나가 우선하지 않음
    • 둘은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임
  • 접근 가능한 세계는 그 세계에 대해 가진 정보이며,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임
  • 현실에 대한 궁극적이거나 근본적인 설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요구할 필요는 없음
  • 모든 설명은 근사적이고 사각지대를 가지며, 현실 안에서 실현되고, 같은 현실의 일부에 신체화됨
  • 표상과 그것이 구현된 장소 사이에는 연결부가 있고, 이는 표상 안의 특이점이 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적 간극이나 설명 간극은 아님

더 중요한 과제

  •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존재하지 않음
  • 정신생활은 우주의 다른 현상과 같은 성질일 수 있음
  • 더 흥미로운 과제는 “어려운 문제”를 사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자연의 나머지와 초월적이거나 종류가 다르다고 가정하지 않고 뇌와 몸의 작동을 더 잘 이해하는 것임
  •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내적 자아가 있음
  • 인간은 Kant적 의미의 초월적 주체로 자신을 다룰 수 있음
  • 인간은 감정과 영적 생활을 가지며 qualia를 경험함
  • 이런 것들은 물리적 상태에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물리적 설명에서 “덜어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임
  • 정신 과정은 그 중요한 특징만 포착하는 방식으로 기술된 물리적 과정
  • 처음부터 이원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식탁이 원자의 집합이기도 하면서 식탁이라고 말할 수 있듯 영혼과 감정에 대해서도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음
  • 의식 논쟁이 도입한 해로운 이원론을 버리고, 영혼 또는 영적 생활이 근본 물리학과 양립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함

과학의 성공이 가리키는 결론

  • 이 관점이 이원론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는 과학이나 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 아님
  • 과학은 수백 년 동안 놀랍고 예기치 못한 성공을 거두며, 겉보기의 형이상학적 간극이 실제로는 그런 간극이 아니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 왔음
  • 지구는 하늘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생명체는 비활성 물질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인간은 다른 동물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영혼은 몸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인간은 이 세계의 다른 모든 것처럼 자연의 일부임

댓글과 토론

Hacker News 의견들
  • Rovelli는 의식을 근본적으로 자연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 듯함. 매우 복잡하고 잘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
    철학적 수수께끼를 버리고 우리가 지각하고 추론할 수 있는 현실에 집중하자는 얘기임. 문제는 의식 자체가 철학적 발명품이고, 게다가 매우 미끄러운 개념이라는 데 있음
    의식을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면 이상한 동어반복 상태에 빠짐. 특별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특별한 범주에 넣어버리기 때문임
    더 근거 있고 실용적인 틀로 보면 의식에는 별 관심이 없어질 수도 있음. 정의 불가능성 자체가 큰 단서일 가능성이 큼

    • 의식이야말로 근본 현실이고, 확실히 아는 유일한 것임
      내가 무엇을 지각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앎. 이것이 시뮬레이션인지 아닌지는 잊어도 됨. 그래도 그것은 내가 지각하는 것이고, 그 밖에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없음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탐구 불가능하다는 말이 맞음. 하지만 그 이유라면 다른 것도 전부 탐구 불가능함. 우리가 시뮬레이션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하지도 않음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우리가 가진 지식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의식도 탐구 대상이 됨. 단순히 철학적인 것만은 아님. 이 틀 안에서는 의미 있는 어려운 질문들이 여럿 있음: 왜 어떤 것은 의식이 있어 보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가, 우주에는 하나의 의식만 있는가 아니면 여럿인가, 의식은 국소적이고 몸에 깃든 것인가, 의식의 물리적 기반을 복원하면 같은 의식이 돌아오는가 아니면 동일한 별개의 의식인가, “같음”과 “동일함”의 구분이 의미가 있는가 등
    • “의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늘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유물론자나 비종교인이라고 설명하는 현대 철학자들이 동시에 인간 경험에는 특별하고 자연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점이 흥미로움
      둘 중 하나여야 함. 자연이 전부라면 의식은 순전히 자연 현상이고, 조사 가능하며, 언젠가는 복제도 가능할 것이고, 다른 존재나 기계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할 수 없음. 아니면 현실 바깥에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신이라고 불러도 됨
      나는 전자 쪽에 강하게 서 있지만 후자 자체에는 문제가 없음. 짜증나는 것은 두 생각을 동시에 지지하려는 비일관성임. 양쪽을 다 가질 수는 없어야 함
    • 많은 사람이 물리 세계 속 자기 위치에 매혹되고, 물리 세계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물리 법칙과 과정으로 뇌 같은 것을 만들고 그것이 의식을 낳는다는 강력한 생각에 사로잡힌 듯함
      내게는 그 생각이 완전히 거꾸로 보임. 오히려 내가 의식적 경험을 하고 있고, 그 경험에서 물리 세계와 그 법칙과 과정들이 나타나는 것이 분명해 보임.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물리 세계의 서사임. 내가 목격하는 물리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고 나를 설득하려 드는 경우가 많음. 어쩌면 시적으로 나를 그 안에 묶어두고, 우리가 물리 세계라 부르는 경계 안에서만 살아 있다는 믿음에 가두려는 시도처럼 보임. 진실은 반대일 수 있음
      내 의식이 물리적 뇌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려움. 오히려 내 뇌가 의식에서 나온다는 쪽이 더 그럴듯해 보임. 의식이 무엇이든 간에
      의식적 경험이 특별해서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감흥이 없음. 대신 물리 세계가 더 특별하고 흥미로운 부분이며 설명이 필요하다고 봄. 물리 법칙과 과정을 모두 기술하자는 게 아니라, 왜 애초에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임. 답을 찾겠다고 물리적 구석을 뒤지는 데 정신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무엇이 애초에 이런 세계를 낳았는지를 탐구해야 함
      그리고 바로 그것이 진짜 어려운 질문임. 우리가 여기 도착하기 위해 모두 도망쳐 나와야 했던 심연을 어깨너머로 들여다볼 때 답하게 되는 질문임
    •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으로서 여러 해 동안 의식을 논쟁해 왔고, 관련 학술서도 많이 읽어봤음
      내 경험상 의식이 인간에게만 특별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 대다수는 거의 항상 종교적 배경에서 출발해 종교적 렌즈로 바라봄. 의식을 물리 현실로 환원하면 자유의지에 대한 함의가 꽤 명확해지고,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쪽에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해는 됨. 이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근본적으로 기반한 많은 종교를 사실상 무너뜨림
      전체 사고 과정을 자세히 쓰려면 길어지지만, 짧게 말하면 자유의지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능력은 우리에게 숨어 있음. 많은 사람이 양자역학과 그 무작위성을 의식과 자유의지가 존재할 공간으로 끌어오지만, 신경학적으로 우리는 양자 효과가 측정되는 규모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작동함. 게다가 양자 사건의 결과는 진정한 무작위라 통제할 방법도 없음. 그러려면 우리의 신경 생리적 마음이 양자 공간을 조작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하는데, 당연히 그럴 수 없음. 뇌가 작동하는 수준에서는 이미 결정론적 물리학의 영역임
      당사자들은 강하게 부정하지만, 내 인상으로는 “틈새의 신” 논증을 하고 있음. 의식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정의도 못 하는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전형적인 틈새의 신처럼 느껴지지 않는 듯함
      그래서 위 댓글이 꽤 흥미로웠음. 개인적으로 철학은 매력적이고 유용한 도구라고 보지만, 특히 엄밀한 과학이 정보를 줄 수 있는 영역에서는 사람을 오도하는 경향도 분명히 있음. 물론 과학철학 자체를 둘러싼 논쟁도 있지만 여기서는 주제에서 벗어난 느낌임
    • 의식을 자연 현상으로 보면서도 환원주의자가 아닐 수 있음. Hempel의 딜레마와 비슷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음: “의식은 질량처럼 물질 배열의 속성이며, 물질이 특정 방식으로 배열된 곳에 존재한다. 마취제처럼 그 배열을 교란하면 의식은 사라진다”
      그러면 통합정보이론 같은 것에 도달함: https://iep.utm.edu/integrated-information-theory-of-conscio...
      이런 관점에서는 글의 부제인 “의식은 물리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 우리의 ‘영혼’은 몸과 세계의 다른 현상과 같은 본성을 지닌다”가 참임. 질량이나 전하처럼 의식도 물리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 조합의 또 다른 속성이나 특징일 뿐임
      하지만 그런 이론에도 여전히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남음. 퀄리아 같은 의식의 구별되는 특징은 제대로 검증하려면 내부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임. 연구자들은 “속성 X가 성립하면 그 물질 덩어리는 의식이 있다”는 이론을 만들 수 있음. Tononi가 통합정보이론에서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이론이 꽤 정교할 수도 있음. 일시적 의식 상실을 예측한 모든 조작에서 실험 대상자가 “그때는 의식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음
      그래도 바깥에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감지할 수 있을 때까지 어려운 문제는 남음. 다만 관찰 가능한 결과를 예측하는 것만 원한다면, “이 마취제 같은 것은 외부 관찰자에게 의식 상실과 구별 불가능한 결과를 낸다”는 의식 이론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음
  • “이것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배운 모든 것과 모순된다”는 말은 맞지 않음. 아무것과도 모순되지 않음. 그저 현재 이해에 빈틈이 있고, 미래에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임
    어려운 문제를 반대하는 사람들, 즉 그런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기본 반사 반응은 여기에 종교적·영적 의미를 붙이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멂. 언젠가 답하길 바라는 과학적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마법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를 뜻하지는 않음. “평행우주는 존재하는가”나 “빅뱅 이전에 다른 우주가 있었는가”처럼 영원히 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질문들이 있음

    •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틀림. 신이나 영혼의 존재에는 결정적 판별 실험이 없음
      종교와 영적 전통은 최소 3000년 동안 바로 이 질문과 씨름해 왔음. 이것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임
    • 내 입장은 퀄리아가 “이 유기체는 공간과 시간에 걸친 자기 연속성과 통일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진화적 반응으로 뇌가 시뮬레이션한 것이라는 쪽임. 뇌가 발달할수록 이 인상은 더 강해야 함
      이 입장은 원래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동물과 신생아가 거울 테스트에 보이는 반응에 대한 철학적 답을 찾기 위해 세운 것임. 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접했을 때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음
      핵심 근거는 공격이 아니라 핸런의 면도날임.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더 단순한 설명이 있으면 들을 것임. 없다면 가장 단순한 해법이 틀렸음을 보여야 하고, 그러면 두 번째로 단순한 설명으로 가겠음
    • 어려운 문제는 과학으로는 10억 년 뒤에도 풀 수 없음
      과학이 원리적으로 의식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쉬운 문제
  • 글쓴이는 중세 철학에 대해 흔한 오해를 보여줌. 중세 스콜라 전통은 몸과 영혼이 “별개의 실체”라거나 물질이 “비천하다”고 보지 않았음. 그런 생각은 오히려 기독교 사상가들이 단호히 반대한 영지주의 집단의 입장이었음. 못 믿겠다면 Augustine의 “Confessions”를 읽어보면 됨
    스콜라 철학자들은 몸과 영혼이 같은 실체, 즉 인간을 이루는 두 구성 요소라고 가르쳤고, 둘 다 신이 창조했으므로 선하다고 봄. 말하자면 두 구성 요소를 가진 하나의 선한 본질임. 영혼 구성 요소가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영혼이 자연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는 뜻은 전혀 아니었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물리 세계관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임. 그들에게 물질은 창조의 한 구성 요소일 뿐이었음
    엄격한 심신 이원론은 중세 스콜라가 아니라 Descartes와 함께 등장한 근대성에서 도입됐고, Kant와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더 발전시켰음. 즉 이것은 중세적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 철학이 만든 문제에 훨씬 가까움
    글쓴이가 주관적 경험을 사물의 성질과 동일시하거나, 뇌의 과정을 마음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도 사실을 무시함.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성질은 많은 경우 그것이 우리 안에 만들어내는 감정과 명백히 구별됨. 아름다움, 숭고함, 부정의 등은 경외, 겸손, 분노 같은 별개의 감정을 낳음. 또한 마음이 뇌 과정과 동등하다면, 우리가 분명히 가진 마음의 특정 능력, 예컨대 바로 그 뇌 과정 자체를 우리 안에서 성찰하는 능력은 불가능해야 함

    • 물리학자가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쓰는 모습이라니, 성가신 물리학자 풍자의 전형 같음
  • 갑자기 왜 이렇게 어려운 문제 얘기가 많이 나오는지, 또 왜 사람들이 계속 이해하는 데 애를 먹는지 잘 모르겠음. 사실 매우 단순함. 어려운 문제는 구조와 기능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현상적 의식을, 구조와 기능이라는 설명 자원만으로 설명하려 할 때 원리적으로 생기는 난점을 가리킴
    고양이에 관한 사실을 개에 관한 사실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과 비슷함. 서로 다른 기술 범주일 뿐임. 정말 그게 전부임
    물리주의가 성공할 희망이 있는지는, 과학의 표준적 구조·기능 설명 틀에 더해 그 간극을 메울 개념적·설명적 통찰이 있는지에 달려 있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름. 이 가능성에 대해 판결을 내리기에는 확실히 이름
    하지만 물리적 용어로 된 완전한 설명에는 새로운 개념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해야 함. 따라서 의식 문제는 과학 데이터가 더 쌓이면 사라질 단순한 과학 문제가 아니라, 핵심적으로 철학적 문제

    • 이 문제가 자꾸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의식과 도덕적 인격성을 잘못 뒤섞고 있기 때문임
      사람들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AI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지 여부임. 비인간 동물의 경우 이 논쟁은 종종 그 동물이 의식적 경험을 가지는지에 초점이 맞춰짐. 감정과 경험 시스템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는 점에는 의심이 적기 때문임
      AI에서는 이 비유가 어긋남. “의식”의 정의는 모델이 자기 자신에 대한 범주를 세계 모델 안에 갖고 있고, 자기 출력에 피드백을 거는 등 명백히 적용되는 듯함. 하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우리가 감정이나 고통으로 인식하는 것 사이의 비유는 매우 무리함
      해법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관련 있는 고통을 생각할 때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임. “의식”보다 훨씬 명확한 질문이고 문제를 우회할 수 있음
    •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의식이 없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만함. 의식적 경험이 가진 뉘앙스와 그것이 “구조와 기능”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그런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이해하겠음? 그들에게는 의식의 쉬운 문제만 있을 뿐임
      물론 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들이 실제로 의식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것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음. 왜냐하면 바로 의식의 어려운 문제 때문임
    • 과학이 우주의 기원을 언젠가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판정이 있는가? 과학이 의식의 진짜 어려운 문제에 답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움. 특히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맹목적으로 과학 낙관주의에 빠져 있는 듯함
  • 첫 번째 논점, 즉 어려운 문제를 Darwinism에 대한 반응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흔한 수사적 움직임. 비유와 사상사의 조합이라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그래서 무엇을 증명하는가?
    철학적 좀비는 주관적 경험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할 것임. 그렇지 않다면 인간과 경험적으로 구별 가능해지기 때문임. Chalmers의 요지는 그가 말하는 가상의 환원 불가능한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내성으로만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임. 내성 중에는 내 뇌의 물리적 과정이 내가 의식이 있다고 납득하게 만듦. 이론적으로 좀비의 뇌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고 납득하게 될 것임
    그래서 환상주의는 만족스러운 설명이 아님. “납득하게 만든다”고? 누가 납득하는가? 누가 이것을 경험하는가?
    의식의 쉬운 문제가 해결됐다고 상상해보자. 이온 통로부터 모든 규모에서 뇌를 이해하고, 사과를 보고 “apple”이라고 말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든 추상화 수준에서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자. 시신경을 따라 신호를 추적하고, 그 신호를 고수준 정신 표상에 매핑하고, 그 기호들이 생성 규칙의 트리가 되고 다시 단어가 되어 운동피질이 말로 조정하는 과정까지 설명할 수 있음. 임의의 시간 t에서 시야의 모든 “픽셀”도 매핑할 수 있음
    이제 이 설명의 라벨을 일관되게 바꿔 외계인에게 보여준다고 해보자. 외계인은 매우 복잡한 정보 처리 기계의 도표를 보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할 것임. 계산기, 물 적분기, 전화망, 유럽연합 선물시장만큼이나 의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음
    모든 계산이 계산기, Excel 스프레드시트, 계산자, Factorio처럼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철학적 좀비이고 의식은 환상임. 이는 깨어 있는 매 순간의 경험과 모순됨. 의식과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임. 아니면 뇌부터 계산자와 스프레드시트까지 모든 것이 의식적이어야 하는데, 이는 놀랍고 여러 문제도 낳음. 예컨대 왜 내 뉴런들은 개별적으로 의식적이지 않은가? 왜 의식은 내 두개골에서 멈추는가? 즉 뉴런의 신호열 인과성이 왜 내 두개골의 하이드록시아파타이트 결정 속 포논보다 더 “의식적”인가?
    이것이 어려운 문제임

    • 여기서는 여러 방식으로 전제를 미리 깔고 있음
      첫째, “내 경험상 나는 의식이 있고, 수학은 의식을 만들 수 없으므로 의식은 별개의 것이다”라는 전제임. 누가 수학이 의식을 만들 수 없다고 했는가? 그에 대한 경험적 증거가 있는가?
      둘째, “의식의 쉬운 문제를 풀었고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안다”는 말은 뇌의 모든 특징을 매핑하는 과정에서 의식의 형성을 알게 되지는 않았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함. 이것 역시 희망적 사고 외에는 지지 근거가 없는 가정임
      더 나아가, “어떤 수학은 의식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모든 수학이 의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수학의 모든 부분이 의식이어야 한다”는 뜻도 아님
      암묵적 정의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면 의식을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함.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인간의 기본 움직임이 그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어려울 뿐임
    • 이 문제를 해결할 희망은, 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나면 정상 작동 중 뇌가 만들어내는 자기지시적 사람에 해당하는 어떤 과정이 명확히 드러날 것이라는 데 있다고 봄. 마취는 “사람”에 해당하는 물리 과정이 있다는 강한 증거임
      어려운 문제는 정말로 위에서 말한 지점, 즉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했는데도 의식을 그 어떤 부분에도 배정할 수 없고, 그럼에도 마취처럼 끄고 켤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에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음
    • 이 어려운 문제에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단순한 답이 있다고 봄. 의식은 강력하고, 우리의 “계산기 뇌”에 근본적인 환상임. 그리고 네 뇌의 모든 뉴런을 시뮬레이션하는 스프레드시트도 그것을 시뮬레이션할 것임
      개념화하기 어렵다고 해서 답이 아니라는 뜻은 아님. 일반상대성이론을 직관하기 어렵거나, 빅뱅 이전 우주의 상태 또는 그 비존재를 상상하기 어렵거나, 죽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기 어려운 것과 비슷함. 우리의 직관은 이런 경우에 맞게 갖춰져 있지 않고, 강하게 반발함. 의식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봄
      진화적 관점에서도 의식 같은 환상의 출현은 어느 정도 따라 나옴. 생존하려면 “계산기” 뇌는 외부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고 생존 확률을 높이는 행동을 하기 위해 외부 세계 모델이 필요함. 그런 모델이 생기면, 뇌 자신도 모델링하는 세계의 일부이자 그 안의 행위자이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델을 포함하는 것이 거의 필연적임. 이 자기지시적 고리가 우리가 “의식”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현실을 이해하고 헤쳐 나가는 방식의 중심이 되는 듯함
      이 틀을 받아들이면 전통적 역설 상당수가 저절로 사라짐. 문제는 실질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상상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만 어려워짐
    • 왜 “모든 계산이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와 “모든 것이 의식적이다”만 선택지로 두는가? 예를 들어 재귀 제어 시스템 같은 특정 종류의 계산만 의식적일 수도 있음
    • 환상주의와 어려운 문제를 오해하고 있는 듯함
      환상주의는 의식적 경험이 있다고 말함. 그래서 의식적 경험이 있는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 있음
      외계인은 그 계산을 보고 그것이 가진 의식적 경험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임
      인간 의식을 Excel 스프레드시트에 올려도 여전히 의식적일 것임. Chalmers조차 시뮬레이션은 의식적일 것이라고 받아들임. 그러니 그것은 철학적 좀비 논증이 아님. 철학적 좀비 논증을 쓰는 사람들조차 철학적 좀비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음
      다만 결론은 맞음. 시뮬레이션 예시는 어려운 문제에서 말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함. 그러면 남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이고, 이는 쉬운 문제들로 설명 가능함. 이것이 환상주의 입장임
      덧붙이면, 어려운 문제는 단순히 왜 의식이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의식이 물리주의 아래에서 불가능한가에 관한 것임. 따라서 위 글에서 존재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사실상 의식의 쉬운 문제를 가리키고 있음
  • 길이 멀겠지만, LLM과 그 후손들이 실리콘 의식을 옹호하는 점점 더 그럴듯한 논증을 만들수록 우리는 의식이 체액설만큼이나 실재하지 않으며, 사실 우리는 내내 철학적 좀비였다고 결론 내릴 것 같음
    어쩌면 문학적 상상물의 출발점이 반대였어야 했음. 우리가 철학적 천사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러 나서게 했어야 함. 그래야 적어도 증명 책임이 있어야 할 양립론자들에게 놓임

    •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음. 우리는 이미 동물이 “의식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멸시하며 대함
    • 의심스러움. 우리는 다시 한번 논리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차이를 보고 그냥 살아갈 것임. 사회적으로는 이미 대체로 그 지점에 와 있다고 봄
      왜 이것이 철학은 물론 컴퓨터 과학에서도 장애물인지 모르겠음. 우리는 이를 자주 경험하고, 이에 대한 근본 정리도 가지고 있음
      Matrix 같은 영화도 많이 있음
    • 우리가 철학적 좀비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나? 적어도 나는 내가 아니란 걸 앎.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고 가정함. 어쩌면 당신은 그럴지도?
  • 이 글은 정말 답답했음
    글쓴이는 John Searle 같은 비이원론적 자연주의자와 Dennett 및 Churchland 부부 같은 제거주의자 사이의 흐릿한 위치를 취하면서, 그들과 전혀 제대로 맞붙지 않는 듯함. Chalmers나 Nagel 같은 사람들을 동기부여하는 그 관점들의 문제점까지 파고들지는 더더욱 않음
    글은 결국 손짓으로 얼버무리는 문장에 도달함: “마음은 고수준 언어로 적절히 기술된 뇌의 행동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내 경험도, 나에 대한 외부 경험도 일차적이지 않다”
    이런 문장과 양립 가능한 의식 이론은 많음. 위의 입장들도 그렇고 그 밖에도 여럿임. 각각은 저마다의 철학적 대가와 받아들여야 할 난점이 있음. 글쓴이는 대체로 그것들을 모르는 듯하면서도, 어쩐지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신하는 듯함

    • 철학자가 아니면서 오래된 철학 논쟁에 들어와 실제 쟁점들을 전부 손짓으로 치워버리기 때문임
    • 이 주제 자체가 답답함. 사람들은 실제로는 이것에 대해 아주 조금만 알면서도, 결국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고 논쟁하게 됨
  • 이 글은 세부가 꽤 빈약하지만, 이원론 없이도 현상적 의식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일반 논지에는 동의함. “의식”이라는 단어에는 짐이 많아서 인지를 의식으로 잘못 라벨링하게 만듦. [1] 그래서 무엇을 말하는지 명시하려고 “퀄리아”나 “현상적 의식” 같은 용어를 쓰는 것을 좋아함
    그래도 어려운 문제를 통째로 기각하는 새로운 유행은 마음에 들지 않음. 우리는 현상적 의식에 대한 설명을 정말로 갖고 있지 않음. 심지어 설명하려면 새로운 물리학이 필요할 수도 있음 [2]
    이것이 의미론적 논쟁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과학과 윤리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의미 있는 결과가 있음 [3] 예를 들어 우리가 물리주의자이고 현상적 의식이 세계의 속성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과학이 놓치고 있을 수 있는 세계의 다른 관찰 불가능한 속성들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는 현상적 의식에 대해 오직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타인에게서 관찰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려야 함
    [1] https://write.ianwsperber.com/p/what-is-the-color-blue
    [2] https://youtu.be/DI6Hu-DhQwE?si=RB3qkt6PZ62SVpx3&t=2493
    [3] https://write.ianwsperber.com/p/morality-without-consciousne...

    • 글쓴이가 어려운 문제에 대한 믿음을 비경험적 종교관에서 온 일종의 영적 짐으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이상했음. 그는 “지난 3세기 동안 발전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현상적 의식의 생각과 대립시키고 싶어 하는 듯한데, 내게는 터무니없어 보임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것은 어떤 종교적 정신보다 독일 관념론과 그 데카르트적 뿌리에 훨씬 더 깊이 닿아 있음
      퀄리아의 형이상학적 힘, 혹은 굳이 말하자면 그럴듯하게 단지 물리적인 힘을 부정하는 이들은 우리가 가진 가장 명백히 참인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설득하려는 철학적 좀비라고 거의 확신하게 됨. 좀 더 관대하게 말하면, 현대 경험과학의 전제에 너무 깊이 젖어 있어서, 바로 그 전제를 사용하는 데 실제로 필수적인 자기 자신의 근본적 현상 경험을 너무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해 무시하는 것임
      불쌍하고 무시당하는 퀄리아여. 과학자들이 네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예전에 여기서 흥미로운 댓글을 읽었는데 다시 찾지 못했음
    기본적으로 문제를 뒤집었음. 우리는 물리적 기반에서 시작해 어떻게 의식에 도달하는지를 논쟁함. 그 댓글은 의식에서 시작해 어떻게 물리적인 것에 도달하는지를 논할 수 있다고 했음. 의식적 경험을 통한 실험 등으로 말임.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의식적 경험을 신이라고 불렀으며, 우리 모두가 이 신성의 조각을 공유한다는 식으로 더 이어갔음
    철학의 “진영”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기억하려는 것의 용어를 알 수 있을까? 평생 대체로 “유물론자” 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것 같은데, 학문 분과로서 철학에는 또 어떤 흔한 입장들이 있는지 궁금함

    • 이쪽은 전통적으로 관념론이라고 불리고, 보통 아주 빠르게 여러 종류의 유아론으로 붕괴함
      “서로 다른 사람마다 개인적인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격을 가진 하나의 존재하는 영혼이 ‘물리적’ 현실을 꿈꾼다”는 가설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내 상상력이 그렇게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도밖에 없음
    • 설명한 것은 Berkeley의 주관적 관념론 변형처럼 들림
      https://en.wikipedia.org/wiki/Subjective_idealism
    • 범심론?
      https://en.wikipedia.org/wiki/Panpsychism
    • 여기서 내 생각을 공유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이것은 내 사고 과정과 꽤 비슷함. 의식만 있다고 시작한 뒤, 물리적 우주로 가는 경로를 찾으면 어떨까?
      의식은 본질적으로 알아차림에 관한 것이므로, 어느 순간 의식은 자기 자신을 알아차릴 것임. 그러면 전/후 개념이 생기고, 거기서 반대, 증가, 감소, 1차원 공간 등이 생김.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다른 의식들을 “생성”하고, 각각이 자기 경험과 이해의 거품을 확장하다가, 결국 다른 의식들이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물질이 있는 전체 우주를 만들 만큼 복잡해질 수 있음
    • 한 가지는 확실함. 우리는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 이는 세계가 “물리학이 있고, 그 위에 물리학을 단순히 감시하는 의식이 있다”는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임
      이것은 참일 수 없거나 가능성이 낮음. 우리가 의식을 논의하고 있으므로, 말하는 물리적 행위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무언가에 의해 구동되고 있기 때문임. 의식에서 물리학으로 돌아가는 연결이 있어야 함
      더 단순한 방식은 물리학이 곧 의식이라고 가정하는 것임. 과학으로서의 물리학은 일종의 내성 활동임
  • 본문 인용: “그러고 나서 그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가 있다고 선언했다. 왜 뇌의 행동에는 애초에 경험이 동반되는가라는 문제이고, 이를 의식의 ‘어려운’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어려운 문제는 “왜”가 아니라 어떤 느낌인가에 관한 것임
    청각장애인에게 장3화음과 화음을 듣는 느낌이 어떤지, 시각장애인에게 마젠타를 보는 느낌이 어떤지 설명해보라
    무엇을 말하거나 수화하거나 써도 그들이 그 감각을 경험하게 만들 수는 없음
    결국 너 말고는 아무도 너로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음
    그렇다고 주관적 경험을 모델링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님. 다만 모델 일반에 적용되는 단서가 여기에도 적용됨. 모든 모델은 틀렸고, 일부는 유용함
    이원론이 반드시 주관성이 말로 표현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님. 마음과 물질은 수학적 쌍대처럼 작동할 수도 있음. 플라톤 입체의 정육면체와 정팔면체, 정십이면체와 정이십면체, 정사면체와 자기 자신, Voronoi 도표와 Delaunay 삼각분할 등이 그렇듯이. 이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서 생성할 수 있지만, 각자 고유한 성질을 가짐

    • 퀄리아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인가”를 뜻할 때 자주 쓰는 용어임. 어려운 문제는 “왜 퀄리아가 있는가”임. 물론 이는 퀄리아가 일관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데, 일부 철학자들은 이를 다툼
    • 의도한 답은 아니겠지만, 이원성이 눈에 띄었음
      장화음은 두 기본색이 섞여 기분 좋은 합성색을 만드는 것과 비슷함. 잘못된 기본색을 섞으면 결과가 감각적으로 틀리게 느껴짐
      마젠타는 D와 F#을 함께 연주할 때와 비슷함. 노을에서 볼 때는 아기들이 웃는 소리에 둘러싸인 D장화음 같음. 전장에서 볼 때는 바람과 비 소리와 겨루는 D단화음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