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 by GN⁺ 11시간전 | ★ favorite | 댓글 1개
  • 심리치료 용어가 대화를 장악하며, 인간의 감정과 성격에 대한 언어를 축소함
  • 현대 사회는 모든 특성을 문제로 간주하고, 진단명이나 설명에 집착함
  • 우리의 경험과 기억조차 임상적 용어와 진단으로 대체되는 현상 확산
  • 인간적인 미스터리와 감정은 사라지고, 분석과 자기설명에만 집중하는 문화 형성
  • 자신을 해석하려는 강박이 오히려 불행을 키우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함

심리치료 문화와 성격의 상실

최근 심리치료적 언어가 일상으로 스며들면서, 인간의 로맨스와 관계, 상처와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
이러한 접근법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성격적 특징이나 습관, 강한 감정이 모두 ‘문제’로 규정됨
누군가의 단순한 행동이 사랑스럽거나 독특하다는 해석 대신, ‘ADHD’, ‘자폐’ 등 진단으로 대체됨
특히 젊은 세대는 흔한 성격적 특징마저 장애로 배우고 있음
2024년 설문에서 Z세대 여성의 72% 가 “정신 건강 문제가 내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라고 답변한 반면, Boomer 남성은 27%만 동의함

모든 것의 원인 찾기와 설명의 욕망

현대인은 심리적, 과학적, 진화적으로 모든 것에 설명을 붙이려는 본능을 보임
이런 설명 욕구는 미스터리, 낭만, 자기 자신까지 잃게 만드는 현상으로 이어짐
이전에는 사람을 소개할 때 ‘잊을 수 있을 만큼 사랑스럽다’는 식의 설명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임상적 용어로만 해석됨
가족의 애정 어린 묘사마저 의료화, 진단명과 평가로 변모함
이러한 변화로 우리는 ‘사람’이 아닌 ‘상품’이 되었고, 각각의 진단명이 ‘라벨’이 되었음

성격과 경험의 해체

사람의 성격도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고, 오직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사람’, ‘불안하게 애착하는 사람’ 등으로만 분류됨
확실한 진단 없이도, 부모 세대 마저 ‘미진단 ADHD’, ‘자폐’, ‘정서적 결함’ 등으로 평가됨
경험 자체도 더 이상 ‘시즌’이나 ‘추억’이 아니라, 오로지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 단서로만 간주됨
사랑과 감정도 트라우마 반응이나 애착 문제로 환원됨
이 모든 것은 ‘건강한 사고방식’으로 여겨지지만, 결국 삶의 신비와 감동이 사라지는 결과 초래함

세대 간의 인간성 인식 차이

이전 세대는 스스로를 아내, 어머니, 남편 등 명확한 역할로 정의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상이나 진단으로 설명함
이전에는 실수나 결정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모든 걸 분석하려고 함
관계,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큰 선택조차 이성적 근거나 논리적 분석만으로 접근하려는 경향 강조됨
이러한 분석 습관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인간적 경험마저 두렵거나 불확실한 것으로 인식함
과거에는 단순히 느꼈던 행복이나 소박한 만족도 현재 세대에게는 불안과 혼란의 원인이 됨

진단 산업, 자기이해의 함정, 그리고 인간성 회복

현 세대는 정신 건강 산업의 영향과 정보의 과다 속에서, 통제와 확실성을 강박적으로 원함
물론 진단 덕분에 도움받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모든 걸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함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기억 역시 ‘증거’와 ‘설명’, ‘트라우마 연대기’로만 받아들임
이러한 방식이 해방적이고 자유로울 거라 착각하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을 시장과 전문가들에게 상품처럼 내어주고 있음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미해결성을 받아들이고, 설명에 집착하지 않는 용기가 현대인에게 필요함

마무리 메시지: 인간의 신비로움과 자기 체험의 용기

우리를 규정하는 ‘정신 건강 업계’가 요구하는 대답과 해석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문화는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임
진정한 용기는 모든 걸 해석하고 통제하려는 힘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부분을 받아들이는 능력임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 추억을 스스로 상품화하는 대신, ‘정상적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함
사람답게 산다는 건 완벽한 설명 대신, 모험과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임
스스로를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지키는 것, 그 자체로 해석이 필요 없는 선언임

Hacker News 의견
  • 수십 년 전, 처음 비정상 심리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께서 거의 철칙처럼, 학생들이 배우는 모든 장애의 "약한 버전"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진단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음. 이후로도 이 현상이 꾸준히 사실이었고, 이제는 TikTok 셀프 진단 산업 덕분에 훨씬 더 강해진 느낌.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라벨을 붙일 수 있게 해주면 반드시 붙인다는 점, 자신의 문제에 이름이나 형태를 부여하는 라벨링 기회를 주면 역시 그걸 받아들인다는 점, 대부분의 정신장애는 보통 사람들의 경험과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이 있음. 이런 걸 바탕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더 깊은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음

    • 최근 내가 만난 젊은 세대와 일하면서, 사람들이 문제에 라벨을 붙이고 싶어한다는 점이 정말 널리 퍼져 있음을 느낌. 심지어 TikTok을 한 번도 보지 않아도 현재 TikTok의 셀프 진단 트렌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음. 문제에 라벨을 붙이면, 다른 사람이 그걸 비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이 세대에 널리 퍼져 있음. 젊은 사람들은 이를 방어적 전략으로 써서 거의 모든 것에 라벨을 붙임. 얼마 전 유행했던 "time blindness"라는 개념도 그런 예인데, 늘 늦거나 시간을 못 맞추는 사람들이 TikTok에서 이게 질환인 양 소개하는 걸 보고 자기 자신에게 그 진단을 적용함. 그래서 사람들이 갑자기 약속에 늦고, "나 time blindness 있어서요"라고 당연하게 말함. 라벨을 붙이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면허라도 주어진 것처럼 행동함. 더 답답한 건, 이렇게 셀프 진단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시간을 못 지키게 됐다는 점. 자신의 개인적 문제를 상태로 라벨화한 후에는 더 이상 노력할 필요성을 못 느낌

    • 누군가로부터 반 친구들에게 생일 정보를 수집한 후 운세를 적어 나눠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음. 각자 "정확하다"며 의견을 말했으나, 나중에 서로의 운세를 비교해보니 내용이 전부 똑같았음

    • 흥미로운 점은, 같은 대상에 대해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 하나는, 모두가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런 느낌은 무시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누구나 어느 정도 약한 장애를 다 가지고 있으니, 이런 점을 스스로 더 고민해봐야 한다는 관점임

    • 저자의 우려는 TikTok 로그아웃만 해도 대부분 해소된다고 생각함. 저자는 TikTok과 사회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둘은 전혀 같은 게 아님

    • "사람이 자신을 특별하게 느끼게 해주는 라벨을 붙일 수 있으면 반드시 붙인다는 점"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이건 오히려 정반대 현상이고, 매우 최근에 생긴 사회문화적 현상이라 생각함. 20년 전만 해도 진단도 없이 자기가 자발적으로 자폐라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음. 진단받은 소수만 필요할 때 언급했음. 더 이전엔 아예 상상도 안 됐고,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특별함"에 대한 욕구는 매우 다름. 이런 현상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매우 새롭게 생긴 강한 사회 문화적 변화임

  • 예전에는 성격적 특이점을 가진 사람들을 두고 귀여운 속담 등으로 말하곤 했는데, 이 모든 것은 가족, 친구, 지역사회 등 본래의 지원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었음. 지금 치료 대화가 널리 퍼진 이유는 그러한 지원 시스템이 대부분 심각하게 약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는 치료(therapy)가 유일한 도움의 길이 되어버렸기 때문임

    •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가 조금 다를 수도 있음. 이런 지원 시스템이 과거에 비해 약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확실히 "나는 못 도와주니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보라"는 말을 더 쉽게 듣게 됨.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좋은 변화임. 예를 들어, 조울증 같은 경우 빠른 치료가 정말 도움이 됨. 하지만 심한 우울증을 겪어 생명을 잃을 뻔했던 입장에서는, 그 "도움"이란 것이 정말 형편없다는 생각임. 우울증은 치유할 수 있는 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사회적 붕괴에 대한 건강하고 합리적인 반응인 경우가 더 많음. 어떤 정신 질환들은 개인 중심 의학으로는 결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봄

    • 나는 이 두 가지를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서로 독립적인 변수라 생각함. 내 경험상, 치료 언어에 가장 심취한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적 연결도 가장 많은 경우가 많았음. 치료 언어와 그에 따른 용어들은 자기 사회적 지원망 내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도움을 청하는 신호가 되거나, 심지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피하려 치료의 언어로 포장할 때도 자주 쓰임

    • 가족, 친구, 지역사회 같은 지원 시스템이 심하게 무너졌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음. 과거엔 그런 시스템이란 게 아예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음. 다들 그냥 "버텨야 한다"며 살아왔고, 지금은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져서 이제 감당을 못 하는 것임

    • 한때는 별다른 기술 없는 직업으로도 집을 사고 소소한 가족을 부양하는 게 가능했음. 자기 집이 있으면 진단받지 않은 정신적 문제들도 그냥 무시하며 살기 쉬움

  • 현대인의 깊은 본능 중 하나는 모든 걸 심리, 과학, 진화 등으로 다 설명하려는 경향임. 모든 것을 원인, 분류, 보정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체계, 이론, 동기 같은 틀로 말함. 이렇게 설명하는 대가로 신비와 낭만, 그리고 최근엔 자기 자신까지 잃었음. 이런 관점은 과학 거부의 또다른 형태임

    • 정신과 의학은 잘해봐야 그저 근거 있는 추측에 불과하고, 정신 질환이란 단지 증상 집단에 붙인 라벨일 뿐임. 정신과 약의 부정적 효과가 더 긍정적인 경우보다 많은 게 실상임. 인류는 수천 년간 스스로 기능적인 대처법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방법들을 다 버리고 누군가 돈을 벌게 하고 결국 사람들은 이게 자기 잘못이라고 세뇌받게 됨

    • 어떤 과학이 거부당한다고 말하는지 궁금함

    • 오히려 우리가 거부하고 있는 건 사이비 과학임

  • 여기서 "우리"라고 말하는 방식에 의구심이 있음. 나 자신은 이런 담론에 속하지 않는 느낌임. 그리고 "항상 늦으면서 '사랑스럽게 건망증이 심하다'고 불렸던 시절"이라는 데 대해, 30~40년 전만 해도 약속에 자주 늦는 사람은 거의 벌을 받았고 그 성향 자체가 귀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옛날에는 신경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처벌, 조롱, 괴롭힘, 배제를 당했음. 나는 평생 자폐였지만 그런 것에 대한 인식이 없던 세대에서 자랐음. 과거를 미화하거나 잘못된 향수에 빠지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음. 예전엔 신경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식의 따뜻함은 전혀 없었음

    • 나 역시 ADHD인데, 어릴 때 집과 학교에서 내 행동 때문에 심한 평가와 판단을 받았고, 이로 인한 수치심이 오래 갔음. 어릴 때 진단을 받았지만 성인이 되어서야 그 라벨을 인정하고, 나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했음. ADHD라는 이름 덕분에 나와 비슷한 이들과 연결되고, 자신을 이해하고 연민하는 데 큰 도움이 됨. 만약 라벨이 불편하다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불편함 자체도 곱씹고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 또 다른 예로, 오랜 기간 전 배우자에게 심하게 함부로 대우받았는데 왜인지 떠나지 못했고, 오히려 상대의 나쁜 행동을 가리려고만 했음. 지금 생각해보면 파괴적이었지만 당시엔 오히려 그게 옳다고 느꼈던 순간임.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경향성을 이해하고 미리 파악해보려 노력 중임. 하지만 잘못된 과거 향수는 버리고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느낀다"는 감정에는 공감함

  • 지금 논의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은, 배움이나 탐구, 설명이 결국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임. ADHD, 어린 시절 트라우마, 애착 문제 등 내 문제를 알았다면, 그 사실이 행동의 변화를 가능케 하거나 변화의 의도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함. 물론 그냥 배움 자체를 즐기는 경우엔 예외이지만, 결국 배우는 목적은 행동과 실행으로의 연결임

    • "자신에게 ADHD, 트라우마, 애착 문제 등이 있다는 걸 아는 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고 중요한 점을 놓침. 진단 사실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탓하고 미워했던 마음을 멈출 수 있음. 이는 그 사실이 면죄부를 준다는 게 아니라, 그게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는 이해가 실제로 엄청난 심리적 위로가 됨. 실제로 진단받지 않고 ADHD인 대다수는 그런 상태를 이겨내기 위한 다양한 대처법을 평생 쌓으며 살았음. 현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미래에 더 효과적인 방법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됨
  • 이 글 흥미롭게 읽었음. 저자가 겪은 일들은 지역, 정치적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다고 보지만, 평범한 인간의 특징까지 과도하게 병리화하는 현상이 점점 더 많아진 건 맞는 것 같음. 모든 성격적 결함이 꼭 고쳐져야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음

    • 정상적 인간 행동이 병리화된다는 거부감은 어릴 적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호자, 교사, 또래 등에게 판단받거나 오해받았던 경험에서 비롯될 수도 있음. 어릴 적 너무 규칙에 순응하거나 감정을 억누르길 강요당했다면, 지금은 그런 특성을 라벨을 붙여 수정하려는 시도 자체에 방어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음. 치료는 그 방어심을 부드럽게 다루며, 어릴 때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우리 일부에 공감과 목소리를 줄 수 있음

    • "정상"이라는 기준 자체가 해석하기 어렵다고 생각함. "ADHD가 아니라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다"는 밈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물질적 여건 자체가 비정상일 수 있음. 예를 들어 주 60시간씩 일하는 환경이라면 대부분 정리되지 못한 삶을 살게 됨. 그러나 주변도 모두 비슷한 상황이라 나만 유독 힘들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함. 물론 일을 덜 하고도 게으르다고 또 자책할 수도 있고, 약간의 마음가짐 변화로 훨씬 덜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음. 또는 정말 의학적 문제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음. 결론적으로 입증된 의학적 상태가 존재하고, 이런 걸 부정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큼. 요즘은 자기 성찰 자체도 더 공개적으로 이루어짐. 20년 전만 해도 이런 얘기들은 비교적 폐쇄적인 장소에서만 나누었음

    • 누구의 정신 건강 문제든 쉽게 깎아내리고 싶진 않음. 실제로 많은 경우 고통이 진짜임. 다만 충분히 잘 살고 있는 이들이 작은 불편까지 조건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거슬림. 요즘엔 ADHD, Autism이 자주 들먹여지고, 심지어 조금만 꼼꼼해도 OCD라고 자칭하는 것이 거의 클리셰처럼 됨. 불치의 조건에 원인을 돌림으로써 내 탓이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 경향도 있는 것 같음

  • 이 글을 읽으니 TVTropes가 떠오름. 미디어를 해체해서 각 요소(트로프) 단위로 바라보며, 서구 과학식의 체계화 사고방식과 결을 같이함. 관련 트로프는 Measuring the Marigolds

  •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음. 증상 원인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음. 예컨대, 관대함과 비위맞추기는 비슷해 보여도 하나는 사랑, 하나는 두려움에서 비롯됨. 우리는 사람들이 더 많이 사랑을 느끼고 덜 고통받도록 돕고 싶음. 남에게 맞추기 위해 베푸는 대신,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나눔을 추구해야 함

    • 우리가 더 많이 안다고 "믿을" 뿐임. 사회의 가장자리에 만족하며 살아본 사람으로서 최근만큼 힘들었던 적은 없음. 뭐가 바뀌었느냐고 생각하면 원하지 않은 도움임. 예전엔 팬데믹 전 원격 근무로 꽤 만족스럽게 일했지만, 지금은 모든 에너지가 "정말 괜찮다니까요"라고 설명하는 데 다 쓰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의 도움을 주겠다고 다가옴
  • 이 글 정말 좋다고 생각함. 정신 건강 관련 콘텐츠가 넘쳐나고, 이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데 집착함. 이 문제는 과도하게 과장되고, 알고리즘이 특정 내용을 밀어올린 결과임. 애매한 콘텐츠가 더 많은 대중에게 닿아, 해당 계정에는 이득임. 누구나 관대함과 비위맞추기를 혼재하도록 살아가는데, 만약 이런 특성이 삶이나 관계에 치명적으로 해를 줄 때만이 아니라 모든 특징에 문제가 있다고 보면, 결국 우리 삶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릴 수 있음. 요즘은 애매한 관계나 행동을 간단한 라벨로 설명하는 콘텐츠가 넘쳐남. 개인적으로는 요즘 나를 둘러싼 애착 관련 콘텐츠가 무수히 쏟아짐. 밤늦게 TikTok이나 Instagram을 보며 이런 설명을 계속 보다 보면 자신의 행동이나 타인 행동을 모두 설명하려 들게 됨. 이런 콘텐츠는 잠시 그만 보는 게 나음

  • 주의 지속시간을 망가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건 짧은 영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랜덤 보상 구조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