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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대 인터넷 낙관론 한가운데서 Terry Pratchett, Carl Sagan, Sven Birkerts는 온라인 정보 환경이 진실 판별과 깊은 독서를 약화할 수 있다고 경고함
  • Birkerts의 The Gutenberg Elegies는 물리적 책을 온라인 매체로 대체하는 흐름이 주의력과 내면성, 복잡한 서사에 몰입하는 능력을 훼손한다고 봄
  • 인터넷은 생산 도구를 넘어 수용 기술로 작동하며, 하이퍼텍스트와 연결성 위의 디지털 독서는 책 읽기와 다른 경험을 만듦
  • 인쇄 책은 소음, 알고리듬, 감시, 코드 변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단절의 기술이며, 물리적 책의 사적 공간이 독서의 자유와 안전을 지탱함
  • 디지털 시대에 글을 읽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소설과 인쇄물에 오래 머무르는 깊은 독서는 별도의 시간과 의식적 노력이 필요한 실천으로 남아 있음

1990년대 인터넷 낙관론과 초기 경고

  • 1995년 Terry Pratchett가 GQ에서 Bill Gates를 인터뷰했을 때, 미국인의 39% 만 가정용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었고 Pew Research Center 기준 인터넷 연결 비율은 14% 였음
  • Pratchett는 인터넷에 홀로코스트 부정 같은 허위·명예훼손성 글이 올라오면 정보가 비슷한 권위를 갖는 것처럼 보이고, 근거 유무를 판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함
  • Gates는 온라인에서 권위 있는 주체가 생기고 평판 확인 방식이 더 정교해질 것이라고 답했지만, 그 시점에는 Google이 3년 뒤, Facebook이 9년 뒤, Twitter가 11년 뒤에 등장할 예정이었음
  • Carl Sagan은 1995년 The Demon-Haunted World에서 강력한 기술이 소수의 손에 있고 사람들이 의제를 설정하거나 권위를 지식 있게 질문하는 능력을 잃으면, 사회가 미신과 어둠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함

The Gutenberg Elegies가 겨냥한 변화

  • Sven Birkerts의 The Gutenberg Elegies: The Fate of Reading in an Electronic Age는 1994년 12월 1일 출간됐고, 당시의 디지털 전환 낙관론에 반대하는 선언처럼 작동함
  • Birkerts는 물리적 책을 온라인의 덧없는 형태로 넘기는 일이 주의력과 복잡한 서사 몰입 능력을 손상한다고 봄
  • 현대 사회의 교환이 점점 회로를 통해 이뤄지고, 그런 상호작용이 사람을 “가상의 현재”에 머물게 한다는 그의 문장은 오늘날 더 강하게 들어맞음
  • 그가 말한 깊은 독서는 책을 느리고 명상적으로 소유하는 과정이며, 삶을 단순한 순간들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운명으로 감각하게 하는 독서 경험임

당시 비판과 30년 뒤의 재평가

  • The Gutenberg Elegies는 출간 당시 여러 비판을 받음
    • Kirkus의 익명 리뷰어는 Birkerts를 고집스러운 책벌레이자 불평가로 보고, 단순하고 설득력 없는 비탄문으로 평가함
    • Wen Stephenson은 Seamus Heaney를 종이나 화면에서 읽는 경험에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며 매체 차이 질문에 피로감을 드러냄
    • Dean Blobaum은 Birkerts가 전자 매체를 서구 사회 병폐의 희생양으로 삼고, 교육·문해력·문학 문화의 쇠퇴까지 컴퓨터 탓으로 돌린다고 비판함
  • 30년이 지난 뒤에는 Birkerts가 옳았다는 쪽으로 평가가 기울어짐
  • 당시 비판의 핵심 한계는 인터넷 정보가 물리적 코덱스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 있음

인터넷 독서와 책 읽기의 차이

  • 볼펜, 타자기, 인쇄기는 생산 기술이지만, 인터넷은 생산뿐 아니라 수용 기술이기도 함
  • 디지털 독서는 빠르고 연결되어 있으며 하이퍼텍스트가 스며든 우주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물리적 책과 범주적으로 다름
  • 물리적 책은 책장 위에서 하나의 독립된 우주처럼 존재하지만, 가상 공간에서는 내면성·성찰·프라이버시의 차원이 흐려짐
  • 오늘날 디지털 생활은 Twitter, Reddit, 문자 알림, Facebook 같은 글 기반 매체를 통해 이뤄지므로 읽기 자체는 여전히 중심적임
  • 그러나 Wuthering Heights, Moby-Dick, Mrs. Dalloway, Ulysses에 몰입하는 경험은 디지털 피드와 다른 유형의 독서임

깊은 독서가 만드는 내면의 상태

  • 독서의 흐름(flow) 은 다른 존재 방식에 잠기는 경험이며 가능성과 의식의 확장을 허용함
  • 위대한 문학이 곧 선한 사람을 만든다는 식의 교훈적 주장은 배제되지만, 깊은 독서를 포기하는 일은 본질적이고 귀한 무언가를 버리는 일로 여겨짐
  • Birkerts에게 소설 읽기는 자신의 내면 생활과 평행하게 움직이며 그것을 조율하고 강조하는 집중된 내적 활동임
  • 디지털 공백에 끌리는 사람도 소설이라는 낯선 장소에 머물려면 의식적으로 시간을 정하고 주의를 모아야 함
  • 최근 읽은 예시로 Daniel Mason의 North Woods, Rachel Kushner의 Creation Lake, Aleksander Hemon의 The World and All that it Holds, Andrew O’Hagan의 Caledonian Road, Katya Apekina의 Mother Doll이 나옴

인쇄물의 물질성과 지속성

  • 인쇄 책은 종이의 살과 잉크의 피를 가진 살아 있는 동물에 비유되며,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와 비교하면 스크롤은 빈혈적인 경험에 가까움
  • Gutenberg는 금광업자 출신이었고, 포도를 눌러 와인을 만드는 장치와 비슷한 메커니즘에서 활자 인쇄 매트릭스의 영감을 얻은 것으로 소개됨
  • 인터넷의 덧없음은 엔트로피에 끌리며, 지난 수십 년 동안 쓰인 많은 글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 대비됨
  • 반대로 돌,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될 수 있음
  • 인터넷도 실리콘, 구리, 납땜, 회로기판으로 구성된 물리적 영역이지만, 오랫동안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공간처럼 묘사돼 왔음

책은 단절의 기술

  • 책의 구조를 이루는 코덱스는 여전히 필수적인 기술임
  • Irene Vallejo의 Papyrus: The Invention of Books in the Ancient World는 시간 여행을 한 고대 로마인도 알아볼 드문 장치로 책을 언급하며, 삽과 도끼처럼 세기 동안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한 도구로 봄
  • 책의 완성도는 외형, 가격, 견고함이 아니라 단절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옴
  • 책은 인터넷의 소음에 붙들리지 않기 때문에 Birkerts가 말한 내면성을 가능하게 함

감시와 알고리듬에 맞서는 사적 공간

  • George Orwell의 Nineteen Eighty-Four에서 Winston Smith가 텔레스크린의 시야 밖에서 종이 일기에 자신의 의견을 쓰는 장면은 오늘날에도 유효함
  • 현대의 감시 자본주의는 Orwell의 텔레스크린보다 더 강력하며, Big Brother가 엿듣는 대신 Alexa가 듣는다는 식으로 대비됨
  • 인쇄 책은 알고리듬의 네온 신에 맞서는 저항의 공간으로 기능함
  • 코드 조작으로 내용을 삭제할 수 없는 물리적 책의 성격은, 해커들이 Internet Archive에 영향을 준 사례와 대비됨
  • 문학이 살아남으려면 위험해져야 한다는 Birkerts의 문장에 이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시 문해력을 갖춰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짐

댓글과 토론

Hacker News 의견들
  • 수동적 소비(케이블 TV, TikTok 등)에 빠지는 경험은 본질적으로 심리적 소멸에 가깝다고 봄
    릴스에 빨려 들어가면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고, “저기”에 있는 동안 자기 전체가 무너짐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 헤로인 사용과 비슷한 심리 현상이지만 생리적 부작용은 적고 물질적 손실은 시간뿐임
    더 중요한 건 단순한 시간 낭비가 아니라 자아의 파괴이고, 그 여파가 관계와 자기 형성으로 퍼져 지금은 대규모 사회학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음
    다만 “저기”에도 창의성, 생산성, 표현, 유머, 사회성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서 이 문제가 더 어려워짐

    • “현대 웹” 문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데, 이런 사이트를 둘러볼 때는 상상하는 뇌가 혼수상태에 빠진 느낌임
      인터넷 연결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감정, 아이디어, 계획이 한꺼번에 돌아오고, 웹을 보면서도 그걸 잃지 않는 경우는 매우 드묾
      스마트폰 이전, 좋은 DSL 회선이 있던 시절에도 이렇게 페이지에 희석되는 느낌은 없었고, 생각해보면 Ajax 시대쯤부터 웹페이지가 눈 깜짝할 사이 일부만 바뀌면서 웹을 지각하는 방식이 달라진 듯함
    • 읽기에 관한 글에 댓글을 달고 있는데, 읽기도 혼자 하는 수동적 소비 활동
      책 읽기가 관계와 자기 형성을 파괴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닐 테니, 결국 자신이 선호하는 수동적 소비가 다른 사람이 고른 것보다 낫다고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임
    • “단순한 시간 낭비보다 더 주목할 건 심리적 상실, 자아의 파괴”라는 말은 이미 1605년 Cervantes가 『Don Quixote』에서 쓴 내용과 닮아 있음
      책에 너무 빠져 밤낮으로 읽다가 잠이 부족하고 독서가 지나쳐 제정신을 잃고, 책 속 마법·싸움·전투·도전·상처·구애·사랑·고통·불가능한 허튼소리가 머릿속을 채워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여겨졌다는 대목임
      이제 우리는 모두 La Mancha의 사람들이 된 셈임
    • 이건 사실 Neil Postman의 Amusing Ourselves to Death 논지와 거의 같음
      핵심은 매체가 중요하고, 서로 다른 매체는 서로 다른 메시지와 담론에 더 적합하다는 것임
      그래서 Twitter/X나 Bluesky 같은 소셜 미디어에 반대하는데, 기본 구조 자체가 나쁜 소통 결과를 낳기 때문임
      TV와 소셜 미디어가 이미 문화의 등뼈가 된 현실에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Postman의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건 꽤 설득력 있음
      https://en.wikipedia.org/wiki/Amusing_Ourselves_to_Death
    • “릴스에 빨려 들어가면 자기 전체가 파괴된다”는 표현은 너무 보편적인 것처럼 단정하거나, “빨려 들어간다”가 특정 사람이 특정 순간에 겪는 참여 방식일 뿐이라고 봐야 함
      모두에게 해당하는 저주처럼 들리게 만드는 수사는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버티기 어려움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에, 많이 소비하더라도 입술을 깨물거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듯 빈 시간을 대충 채우는 수준임
      의식적 의도 없이 습관적으로 잡혀들 수는 있지만 “소멸”과는 거리가 멀고 다른 일이 생기면 쉽게 빠져나오며, 비교한 중독들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음
  • 여기 댓글 추천으로 Amusing Ourselves to Death를 막 읽었는데, 글에서 Neil Postman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게 이상함
    1985년 그의 기본 논지는 인쇄에서 TV로의 전환이 교육뿐 아니라 뉴스 보도, 정치 담론, 정부 기능까지 오락 형태로 바꾸며 이미 인식론적 붕괴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음
    특히 TV 뉴스가 “이제… 다음 소식입니다” 식의 정신증적 맥락 전환으로 구성된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음
    각 사건은 15~45초 안에 이해 가능한 단순 서사로 축약되고, 끔찍한 강간·살인 보도 다음 순간 할머니들의 베이크 세일 같은 가벼운 소식이 이어져 시청자가 방금 본 것을 성찰하고 흡수할 여지가 없음
    이렇게 보면 YouTube 알고리즘과 TikTok은 TV 뉴스가 이미 우리를 길들인 정보 소비 방식의 자연스러운 진화임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그 책의 거의 모든 논지가 더 관련 있어졌고, 우리는 정보를 맥락에 놓고 깊이 생각하며 불편한 것을 견디는 능력을 더 잃고 있음
    다만 인터넷 세계가 TV 세계보다 나을 수 있는 점은 시간과 시청률 제약이 느슨하다는 것임
    틈새 콘텐츠 제작자 중에는 TV에서는 불가능했을 만큼 더 나은 맥락화, 더 깊은 사고, 더 강한 탐사 보도를 하는 이들이 있고, 그런 콘텐츠는 이론상 우리에게 열려 있음
    문제는 고가용·고무관한 짧은 도파민성 오락의 소방호스를 견디고 그걸 찾아낼 수 있느냐인데,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매일 그 물살에 휩쓸리는 듯함

    • David Milch가 John from Cincinnati를 이야기할 때 이와 비슷하게 짚었음
      TV 뉴스는 실제로 우리가 보는 TV 쇼, 예컨대 Iraq War 같은 것이고, 미국 대중은 TV 쇼에 질리면 뉴스도 다른 쇼로 바뀐다는 식임
      처음에는 흥미진진해서 보지만 결국 싫증이 나며,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분노하는 게 아니라 지루해진다는 점임
    • 글을 쓰는 일과 읽는 일은 사고와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음
      특히 펜, 연필, 깃펜으로 쓰는 물리적 행위는 지면 배치와 문법 구조를 함께 계획하고 구성하게 만듦
      여러 세대의 학습자가 이 능력을 잃었다면 결국 큰 사회적 비용이 따를 수밖에 없음
    • “고가용·고무관한 짧은 도파민성 오락의 소방호스를 견딜 수 있느냐”에 대한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해법은 있음
      뉴스나 토론을 가져오려면 언론 윤리 강령을 따라야 함
      수익 최적화를 하겠다며 인포테인먼트나 클릭베이트를 떠올린다면 역시 언론 윤리 강령을 따라야 하며, 시늉만 해서는 안 됨
      언론 매체의 이사회는 상업적 이해관계와 100% 분리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결국 무너질 것임
    • 2010~2017년에 카페에서 주거와 경제가 불안정한 젊은 남성들이 비디오게임, 음모론, 잘 모르는 집단과 조직을 희생양 삼기, 건강 악화, 수면 부족으로 도피하는 모습을 봤음
      자동화가 “사람들을 여가로 해방한다”는 유토피아적 착각과 달리, 중독과 현실도피가 더 흔해지고 있음
    • TV 이전의 “잘 informed person”을 전제하는데, 그런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현대에는 Atlantic 기사, TikTok, 팟캐스트 같은 인터넷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일 수 있음
      대다수는 늘 정보가 부족했고, 무미건조한 사실보다 감정적 콘텐츠에 끌렸음
      이는 전근대 시대에 최초의 족장을 신성하다고 감정적으로 믿고 사실과 우리 자신 위로 올려놓았던 때만큼 오래된 이야기임
  • 두 가지를 덧붙이면, 미국 교육부의 최근 조사에서는 13세의 텍스트 이해력이 코로나 영향을 받은 2019~2020학년도 이후 평균 4점 하락했고, 2012년과 비교하면 평균 7점 하락했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음
    특히 최하위 학생들의 결과는 최초 전국 조사가 이뤄진 1971년에 기록된 읽기 능력 수준보다 낮았음
    자세한 내용은 https://www.edweek.org/teaching-learning/why-printed-books-a...에 있음
    또 Bloomberg는 최근 2024년 인쇄 잡지 부활을 다뤘는데, 여러 요인이 있지만 핵심은 틈새와 고품질에 있고 이는 곧 자원, 즉 돈으로 이어짐
    물리적 잡지를 읽는 촉각 경험에 대한 향수, 특정 관심사와 공동체를 겨냥한 소규모 독립 출판물, Bloomberg Businessweek와 Sports Illustrated처럼 발행 빈도를 줄이고 고품질 콘텐츠에 집중하는 기존 브랜드의 재배치가 거론됨
    CMP Media Win Magazine 때부터 인쇄 매체에 있었고 다음 달이면 끝나는데, 고품질 인쇄 저널리즘을 위한 자원은 더 이상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음
    유능한 편집 인력, 사진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제작 수단 전반이 부족하며, 코로나 전 사진가 20명에서 이제는 1명과 프리랜서 12명 정도가 된 식으로 다른 부서도 비슷함

    • 코로나 학교 폐쇄와 원격 수업 시기는 오랜 기간 보아온 것 중 한 세대에 가장 큰 부정적 교육·발달 영향을 남긴 사건으로 드러날 것임
    • 그 인재들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함
      업계를 옮긴 건지, 아니면 그들에게 줄 돈이 부족해진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고 싶음
    • 다음 행정부가 교육부를 없애면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알 방법도 없어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됨
    • 여기서 인구통계가 통제됐는지 궁금함
      1970년대 이후 외국 출생자 비율이 늘어난 건 알고 있는데, 이 결과가 비원어민 효과를 제거하려 한 것인지 봐야 함
  • 제목과 겉으로 보이는 논지가 좀 혼란스러움
    책을 아주 자주 많이 읽지만 공간과 접근 편의 때문에 주로 디지털판을 읽는 입장에서는, 무거운 책 뭉치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은근히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쉽다
    책을 정의하는 것이 내용이라면 왜 굳이 인쇄본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음
    Umberto Eco를 디지털로 읽는다고 해서 페이퍼백이나 하드커버로 샀을 때보다 지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음
    오히려 Kindle이나 휴대폰에 수백 권의 책을 넣어 거의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으니 더 왕성하게 읽기 쉬워짐
    어차피 들고 다닐 기기만 있으면 일상 사이의 많은 빈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추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음

    • 디지털과 종이책을 둘 다 읽지만, 전자책에서는 얻지 못하는 공간적 이해가 종이책에는 있음
      어떤 구절을 다시 찾고 싶을 때 대개 책의 어느 물리적 위치에 있었는지 감각이 있어서 10~20쪽 안에서 펼쳐 찾을 수 있음
      적어도 나에게는 이게 둘의 큰 차이임
    • 글이 말하려는 핵심을 찾으려면 꽤 자세히 봐야 했고, 중심 논리는 “Printed books are a zone of resistance against the neon god of the algorithm since tinkering with code can’t delete their contents, as hackers recently did with the Internet Archive”라는 한 문장 같음
      하지만 소프트웨어에서 완전히 후퇴할 필요는 없음
      네트워크 너머 누군가가 내용을 조작하지 못하게 오프라인 읽기를 할 수 있고, DRM 없는 경험을 옹호하고 확보하면 조작을 더 쉽게 알아챌 수 있음
      비트를 많이 복사해 둘 수도 있는데, 이는 소프트웨어의 큰 장점을 적극 활용하는 방식임
      그러니 여기서 “네온 신”에 저항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각자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생각해야 함
    • 두꺼운 책의 무게는 책상이 받쳐주지만, 얼굴에 빛을 쏘는 것은 아무리 약해도 눈에 영향을 줌
      아마 새벽과 황혼을 바라보는 건 꽤 이로울 수도 있음
  • Cronus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
    1494년 Johannes Trithemius는 인쇄술의 발달을 공격하는 『De laude scriptorum』, 즉 “In Praise of Scribes”를 인쇄했음
    같은 논리가 필경사의 관점에서 제기됐는데, 인쇄공은 손으로 애정을 담아 베끼는 사람이 가진 의도와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작품을 필경사만큼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이었음
    마찬가지로 Plato도 기원전 370년경 『Phaedrus』에서 책 자체를 비판했음
    사람들이 이것을 배우면 영혼에 망각을 심고, 기억을 단련하지 않게 되며, 자기 안에서 떠올리지 않고 외부 표식에 의존해 기억하게 된다는 식임
    아마 인간 진화의 흐릿한 구석에서도 고집 센 누군가가 말 자체에 대해 비슷하게 느꼈을 것임
    “아이 어떻게 자기 숨 알겠나, 남의 숨에 목 막히면?” 같은 식으로
    가까운 미래에 에르고딕 문학이 고독한 선형 저자를 대체하면, 변하지 않는 epub이라는 공동 기반을 그리워하는 향수도 생길 것임
    “모두가 대형 언어 이야기꾼이 어느 길로 갈지 스스로 고르면, 우리는 변하지 않는 epub이 주는 공통 기반을 잃는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음
    Chesterton의 “혼돈은 지루하다. 혼돈 속에서 기차는 Baker Street든 Bagdad든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마법사이고, 그의 마법은 Victoria라고 말하면 보라, Victoria가 되는 데 있다”라는 문장을 오늘날엔 “혼돈 속에서 Tolkien 모델은 Frodo를 Erebor나 Southron Lands로 데려갈 수 있지만, 저자는 마법사이며 Mordor라고 쓰면 보라, Mordor가 된다”로 바꿔 쓸 수 있음
    요컨대 Cronus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

    • 텔레비전이 Shakespeare를 대중에게 가져다줄 것으로 상상됐지만 결국 대중이 있는 곳에 맞춰 갔던 것과 비슷함
      선거에서 진 쪽이 유권자의 무지를 한탄하지만, 그건 늘 그랬거나 더 나빴음
    • 새 기술을 두고 많은 사람이 계속 공포를 조장하고 일부는 받아들이는 현상은 거의 상수임
      이는 해당 기술의 실제 장단점과 대체로 독립적이라고 봄
      이런 이상한 점근선과 별개로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이익 대비 위험이 큰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고, 그래서 공포론자들이 맞는 지점에 가까워질 수 있음
      이익은 활용하고 위험은 피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임
  • 중요한 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임
    모든 형태의 대중매체는 못 가진 이들을 위한 먹이이고, 가진 이들은 자기 내부 집단의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정보를 얻음
    Facebook, TikTok, Twitter가 더 중독적일수록 올바른 집단에 속하는 것의 프리미엄은 더 커짐
    소비하는 밈이 인쇄물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일 뿐임

    • “모든 대중매체는 못 가진 이들을 위한 먹이”라는 건 동어반복임
      Facebook, TikTok, Twitter가 더 중독적일수록 올바른 집단에 속하는 프리미엄이 커진다는 말에는 인과관계가 없음
      언제나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 즉 집단에 있는 것이 중요했음
      소셜 미디어가 더 중독적이든 덜 중독적이든, 존재하든 안 하든 이 평범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음
    • 가진 이들이 내부 집단의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정보를 얻는다면, 왜 그들의 행동이 다른 계층보다 더 해로운지 모르겠음
      대리전을 시작하고, 기후 회의론에 연료를 대고, 모든 공유재의 훼손을 허용하도록 정부에 로비하거나 정부를 파괴함
      6~7자리 연봉을 받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5~6자리 연봉을 받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갈라놓음
      자신들의 유산이 살인적 자기이익과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함
      그들의 “신뢰할 만한 출처”는 계급적 이해관계, 자기기만, 탐욕, 편향만 먹여주는 건가 싶음
      세상의 모든 사실과 스승을 갖고도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진짜 이해를 피해갈 수 있다는 게 놀라움
    • 엘리트들이 보통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정말 생각하는지 의문임
      그들은 유명인, 가십 매체 같은 것에 속지 않는다는 뜻인가
      내가 사는 곳의 정치인들이나 이메일·인터뷰를 통해 들여다본 일부 부자들의 삶에서는 그런 징후를 보지 못했음
      내 “내부 집단”의 좌파들과 비교하면 대체로 매우 비판성이 낮고, 정보가 부족하며, 꽤 자기애적임
    • 그냥 URL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면 되는 일 아닌가
      저주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그들 혹은 우리 자신의 편향을 먹여주는 채널에서 돌릴 의지가 부족하다는 데 있음
  • 부제에 웃긴 오타가 있음
    “Ed Simon on What Sven Birkerts Got Right in ‘The Guttenberg Elegies’”라고 되어 있는데, 책 제목은 The Gutenberg Elegies
    Gutenberg는 인쇄기 발명자이고, Guttenberg는 박사논문 표절로 유명해진 독일 정치인임
    https://de.wikipedia.org/wiki/Karl-Theodor_zu_Guttenberg

    • 나에게 Guttenberg는 Police Academy, Short Circuit, Three Men And A Baby로 유명한 배우임
      https://en.wikipedia.org/wiki/Steve_Guttenberg
    • “the ceding of material books to the ephemeral gauze of the online”에도 헷갈리는 오타가 있음
      아마 gauze가 아니라 gaze를 의도했을 것임
  • 이 글은 짧은 형식 매체를 “디지털”로, 긴 형식 매체인 책을 종이로 혼동하는 듯한데,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님
    아무도 없는 곳의 아늑한 의자에 앉아 전자책 단말기로 디지털 독서를 해도 같은 단절감을 경험할 수 있고, 반복사용긴장손상과 눈 피로도 훨씬 적음
    디지털 이전 시대의 잡지, 신문, 단편소설 같은 짧은 종이 글도 저자가 “디지털” 탓으로 돌리려는 소비 경험 변화에 똑같이 책임이 있거나 없음
    우리가 소비하는 것의 문화적 영향에 관해서는 디지털 도입과 장벽 하락으로 양 대 질 논쟁을 할 수 있음
    반대로 “품질”이란 것도 서사를 의도적·비의도적으로 물들이고 편향시키는 소수 집단의 주관적 문지기 역할을 받았다는 반론도 가능함
    이 둘을 어떻게 저울질하느냐는 문화와 미디어에 대한 개인적 관점으로 갈리는 듯하고, 많은 경우 회색지대에 있음

    • 가장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이런 행동이 인터넷이나 TikTok과 함께 새로 생겼다는 전제임
      우리는 과거에 선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눈이 멀어 있음
      마을 알림꾼에게 왕자가 돈을 주고 자신을 칭송하게 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주술사에게 예언을 말하라고 족장이 지시해 자기 지위를 통제했을 수도 있음
      사람들의 마음 점유율을 통제하는 일은 언제나 유용했고, 감정적인 반쪽짜리 진실이나 그보다 못한 것들도 화음 진행이 완결될 때처럼 우리를 본능적으로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꾸밀 수 있음
      합리성, 사실, 논리는 보통 원숭이 뇌에 최대한 맞게 메시지를 다듬어주는 옹호자를 갖지 못하고, 그냥 존재할 뿐임
  • 최근 Maryanne Wolf의 Reader, Come Home을 읽었는데 비슷한 논지가 많았고, 여기에 동의하게 됐음
    책에 몰입하거나 끝까지 읽거나 예전처럼 읽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
    읽기와 책을 바라보는 렌즈가 다른 세계로 던져지는 방식에서, 표지·재킷·책등이 있는 소셜 미디어처럼 짧고 쉽게 읽히는 조각을 훑는 방식으로 바뀐 듯함
    인쇄된 책도 오래 버티는 데 완벽하지는 않으며, 그런 점에서는 석판 같은 것이 더 나을 수 있음
    그래도 온라인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신뢰할 만함
    언젠가는 바뀔 수 있지만 지금은 평균적인 집에 홍수·화재 같은 재난이 닥치는 빈도보다 기술 회사가 망하는 빈도가 훨씬 높음
    Simon and Schuster가 망해도 이미 산 책에는 아무 일도 없지만, Amazon이 망하면 내 Kindle 책들이 계속 읽힐 보장은 없음

    • 책으로 가득 찬 큰 책장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책에는 아직도 찾을 것이 많고 내가 가치 있게 발견한 것이 많다는 증거로 삼는 밈이 떠오름
      어떤 날은 앉아서 차 같은 걸 우려놓고 책을 읽을 수도 있음
  • 인쇄물로 남길 콘텐츠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함
    나는 기술이 인간 경험을 어떻게 강화하거나 훼손할 수 있는지, 그것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무너뜨리거나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지 묻는 올드스쿨 SF를 좋아함
    지금 장르 전체는 상상력 없는 공허한 현대 알레고리의 저점에 빠져 있음
    출간작 대부분이 젠더, 성, 인종, 노동 정치에 완전히 묶여 있고, 모든 것이 현재 정치운동과 인물의 대체물이며 배경은 장식에 불과함
    호기심도, 예견도,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도 없음
    유일한 위안은 SF 단편 선집에 내가 찾는 진짜 SF가 20~30% 정도 들어 있다는 것임
    하지만 서가에서 인쇄 소설을 사는 건 돈 낭비가 될 지경이었고, 고전만 반복해 읽는 데도 한계가 있음
    “SF는 원래 항상 당대 알레고리였다!”고 몰려올 아마추어들을 기다리는 중임

    • SF는 언제나 당대 알레고리였음
      그래서 나는 알레고리보다 문자 그대로이고 구체적이려 하는 사이버펑크를 더 선호함
      다만 사이버펑크도 찾고 있는 방식의 상상력과는 다르다는 점은 이해함
      올드스쿨이면서 비알레고리적인 작품의 예로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함, 혹시 Exhalation 같은 것인가 싶음